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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밥상’을 살리자
[문화비평]‘밥상’을 살리자
  • 교수신문
  • 승인 2008.05.1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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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남기지 마라!’ ‘밥 버리지 마라!’ 어릴 적 밥상머리서 어른들한테 늘 듣던 소리다. 말썽을 피우면 ‘저놈, 밥 주지 마라!’고 하였다. 그처럼 서럽고 무서운 소리도 없었다.
 흐릿해진 마음에 점을 찍어(點心)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밥 먹는 일이다. 한겨울, 따끈한 아랫묵에 할머니가 ‘그릇 가득 꾹꾹 눌러 담아’(艮) ‘뚜껑을 덮어’(亼) 묻어둔 밥 한 그릇. 그게 ‘食’ 자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모시는 마음은 생명을 기르는 마음이다.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食口들. 밥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입에 음식물을 씹으며 얘기를 주고받을 때,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만큼 정겨운 것도 없다. 바로 天地 工事하는 소리 아닌가.

 우리는 숨을 쉬면서 ‘하늘의 기운’(天氣)을 얻는다. 해와 달과 별들의 기운을 내 몸속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신체발부를 통해서는 땅의 기운(地氣)을 얻는다. 산천초목들의 기운을 내 몸속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음식물을 통해서는 곡물의 기운(穀氣)을 얻는다. 곡물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다 받고 자라기에, 곡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내 몸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밥은 하늘이고 땅이다. 아니 하늘만큼 땅만큼 큰 것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라는 불교의 공양하는 마음가짐인 五觀偈. 여기엔 만물의 도움으로 생겨나, 수많은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내 앞에 당도한 쌀 한 톨 한 톨들. 그 낟알에 머리를 숙이는 마음은 당연한 일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일단 삶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매우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삶의 알파와 오메가는 ‘먹고 싸는’ 일들이다. 다른 말로 ‘食色’(=飮食男女)이라고도 한다. ‘먹었으면 내 놓는’ 루틴으로 우리의 일상이 이뤄져 간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음식을 두루 맛보는 즐거움(食道樂)처럼, 밥은 루틴을 바꿀 때 더욱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풍요로운 밥상의 탄생은 밥과 世界의 어울림에서 나온다. 밥상의 개방과 세계화가 그것이다. 빅터 플랭클은『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라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마찬가지로, 밥상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밥상을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밥이 世界와 어울려 밥상을 넓혀간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안전’이다.

 요즘 ‘조류독감(AI)’ 때문에 닭고기도, ‘인간 광우병’ 때문에 쇠고기도 맘 놓고 못 먹게 됐다. 온 나라가 시끄럽다. 밥상을 대하기도 겁난다. 도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하는가? 수시로 비상경보음을 발하는 먹거리들. 먹고 사는데 ‘친숙한 것’들이 하나둘씩 우리 삶을 위협하는 ‘낯선 것’으로 분류되고 감시된다. 피터 싱어의 말대로『죽음의 밥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제국의 문화가 만든 병, 고름으로 가득한 밥상. 섬뜩하다. 왜 우리가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가?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정부는 ‘수입해도 국민들이 먹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인간 광우병의 위험이 적은 데도 국민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가 ‘誤解’하고 있는가. 오해의 당사자는 ‘정부’아닌가. 제국의 레토릭에 혀 놀림을 같이 하는 정부가 한심하다. 실용이란 명분으로 미국의 이익과 간통하며, 우리 밥상의 ‘防衛’마저 미국에 내맡기고 있다. 엄격한 먹거리-식량 관리 시스템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세계화도, 실용주의도 밥상 위에선 요원한 구호일 뿐이다. 정부는 미국산 물품 수입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버나드 쇼는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줄곧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결국 모든 변화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밥상 차리기에 관한 한, 차라리 세계를 우리의 안전 기준에 맞춰서 받아들이는 (버나드 쇼 식의) 비합리적인 인간이 되자. 안전장치 없는 개방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맘 놓고 먹을 밥상 하나 책임질 그런 實用의 정부를 나는 원한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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