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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TV 토크쇼, 오염된 말들의 잔치
[문화비평] : TV 토크쇼, 오염된 말들의 잔치
  • 이강옥 영남대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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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3 11:35:54

이강옥 영남대·국문학

이야기에 대한 사람의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눈을 뜨면서 간밤의 잠자리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잠들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하고 듣는다. 그래서 피터 브룩스는 이야기하기를 또 다른 근원적 욕망에서 비롯된 성행위에 대응시켜 그 구조를 해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화는 그 이야기하기를 건강하게 담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구연하고 향유하는 감각과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야기 형식은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의 경험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는 전제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애써 부정하려 하고 있다.

토크쇼라는 것이 텔레비전 방송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야기하기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대중매체가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웃음을 유발하는 데 집중하거나 특별한 경험을 과시하는 데 머물고 있다. 우리네 경험에는 설사 그것이 평범한 것이라도 항상 어떤 정수가 들어 있어, 잘 선택하고 적절하게 장식하여 품위 있게 말하면 빛나는 언어문화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토크쇼의 출연자들은 자기 이야기가 남의 귀를 솔깃하게 하기 위해 경험을 과장하여 나타내거나 웃음을 유발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기 경험을 차분히 진술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적절한 의미를 추출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스개 이야기를 지향한다고 공언한 ‘만담‘이나 ‘재담‘에서도 경험이 이렇게까지 푸대접받지는 않았다.

이는 웃음을 유발하는 데 자기 경험을 탕진하는 꼴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적 이야기하기가 이미 그렇게 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실 노동의 가치를 조롱하고 서사에서 의미를 탈색시키는 것을 서사원리로 삼고 있는 최불암 시리즈나 사오정 시리즈, 덩달이 시리즈 등이 그렇게 널리 퍼진 현상도 이를 방증한다.

말에 관한 한 가장 수준 높은 감각을 갖추고 있다 할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조차 이야기는 겉도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남자 교수들이 대부분인 그 자리에서는 남을 빈정대는 말장난이나 현실을 피상적으로 담는 정보의 교환이 주류를 이루지 거기서 정작 자기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다.

처지에 따라 항상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이 같은 현상은 남녀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아, 여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잘하는 데 비해 남자들은 남의 이야기를 잘하는 묘한 대조를 발견한다. 이를 두고 남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화제가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자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향을 미화할 수는 없다. 새로운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와 지혜는 이전의 경험들에 의해 구성된 인간관계나 관념체계에 대한 암묵적인 위협이 됨을 기득권을 쥔 남자들이 더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운 경험을 배제하는 ‘이야기의 겉돎 현상’은 남자 스스로 자기가 확보했다고 여기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동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들이 자기의 사사로운 경험과 견문을 서슴없이 이야기화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여자들이 함께 갖추는 여성문화의 강점이다. 우리 전통 가정의 이야기판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중심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해 보자. 여자 이야기꾼의 자기 경험 이야기 하기는 경직되어 있는 사회적 통념과 관계를 허물어 새 판을 짤 기회를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경험이란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바로 자기가 그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점에서 경험의 주체는 그 경험의 진술에서 당당하다. 그리고 그 경험을 서사의 형식으로 담은 이야기란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그 속의 지혜를 공유할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야기판의 소멸이 공동체적 삶의 훼손과 직결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다. 자기 경험을 담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정리하여 반성하는 길이면서 다른 사람과 삶의 지혜를 공유하는 바탕이 된다. 그 바탕 위에서 세상은 새롭게 꿈틀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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