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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빌헬름, 그 어느 지점에서 만난 인물
[學而思]빌헬름, 그 어느 지점에서 만난 인물
  • 안문영/ 충남대·독어독문학
  • 승인 2008.04.14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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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易經』을 도이치어로 번역한 리햐르트 빌헬름(1873~1930)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맞서 봉기한 중국의 의화단이 그리스도교회를 파괴하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던 바로 그 무렵 도이칠란트의 식민지였던 칭다오에 파견된 선교사였다. 당시 의화단의 봉기는 8개국 연합군에게 제압됐지만, 그 이후로도 그는 튀빙엔의 프로테스탄트 종교단체에 소속된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20년 동안 단 한사람의 중국인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자신이 중국 고전의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역경 이외에 논어, 노자, 장자, 열자 등을 도이치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 깊은 중국문화를 소개하는 수많은 글을 발표함으로써, 아편중독으로 알려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부정적 인상을 바로 잡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나처럼 평범한 세속인의 눈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현대의 성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유럽과 중국의 정신적 중개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한국 독문학도인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최근 부쩍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 일부를 ‘동·서 세계대화 형식으로서의 번역 - 리햐르트 빌헬름과 장자’라는 주제로 지난 3월초 도쿄의 리쿄대에서 개최된 훔볼트학술강연회에서 발표했다.  

내가 빌헬름을 만난 것은 학문적 모색 과정에서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처음 나를 도이치문학으로이끈 것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박용철 시인의 글을 통해 만난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준 충격적 감동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이글을 원문으로 공부할 때 나는 문학 동아리에서 습작시를 발표하는 문학청년으로서 짐짓 릴케를 사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든든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 후 8년의 유학 생활 끝에 작성한 학위논문 ‘최후기 릴케시의 역설의 구조’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시적 감동의 근원에 대한 이론적 성찰의 결과였고, 우리말로 옮긴 릴케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오랫동안 흠모해 온 도이칠란트 시인의 시 텍스트와 우리말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는 한국독문학도의 노력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취는 새로운 숙제를 낳았다. 그것은 우선 실존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詩語의 한계에 대한 절망이 쌍을 이루고 있는 후기 릴케시의 ‘시 존재론적 차원’을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을 찾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언어관에서 중세 신비주의를 거쳐 비트겐슈타인과 구체시(Konkrete Poesie)에 이르는 언어회의(Sprachskepsis)의 전통을 대충 살펴보던 나는 노자와 장자도 이미 이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고 있음을 알게 됐고, 마침내 선불교에서 숙제를 풀만한 실마리를 찾게 됐다. 그것이 바로 ‘시적 명상’이며, 이 개념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0년쯤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제독문학자대회에 내놓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나의 릴케연구가 결국 짝사랑에 머물고 말리라는 생각에 자주 쑥스러워졌고, 또 한편으로는 도이칠란트 학자들로부터 우리문화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무척 부끄럽기도 했다.

이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요즘 나의 학술적 관심의 방향을 결정짓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벌써 15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열리고 있는 괴테독회에 참석하는 한편, 주역에 달통한 동료 교수로부터 때때로 중국 경서의 심오한 의미를 배우는 것은 그런 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빌헬름은 이렇게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지워나가는 길 그 어느 지점에서 만난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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