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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室內化의 괴물들
[문화비평]室內化의 괴물들
  • 교수신문
  • 승인 2008.03.0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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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비용은 청결의 후유증에서 그 중요한 일부를 볼 수 있다.
그 후유증은 도시라는 室內化의 미끈한 풍경이 감춘 곳, 바로 그 풍경의 한뼘 아래 쯤이라면 넉넉히 널려 있다.

가령 19세기 초중엽까지만 해도 증상적 진단이 가능한 질병이었던 노스탤지어가 어느덧 사라진 것, 혹은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신해버린 한국에서 아토피라는 질병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거주공간이나 장소적 이동의 여건이 변화한 탓인데, 실은 이것들도 모두 실내화 현상, 그리고 그 후유증과 관련된다.

가깝게는, 실내화는 자본제적 산업화와 직결돼 있다. 산업은 근본적으로 실내를 채우는 人爲이거나, 혹은 ‘실내처럼’ 채우는 人僞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화된 거주공간의 내부를 고르게 채울 수 있는 물건들의 대량생산은 오직 산업화로만 가능해졌고, 자본주의적 교환공간 일색으로 변한 도시는 특별히 실내화를 통해 서로 질투하고 서로 흉내내면서 실내 속으로 물화돼 간다(그러므로, 여담이지만, 내가 자본제적 체제와의 창의적 불화의 방식으로 강조해온 ‘산책’이란 곧 脫-실내화이기도 한 셈이다).

벤야민은 개성이 패턴으로만 드러나는 시장에 대한 대응책으로 등장한 당대 부르주아 개인들의 ‘실내화 환상’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실내를 갖춘 아파트를 사라거나, 아파트의 실내를 이러저러하게 채우라는 근년의 뻔뻔하고 저급한 광고물들에서 보듯이, 이미 ‘장소’(E. 렐프)가 되기에는 너무 철저하게 물화한 공간으로서의 아파트 실내는 결코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아파트야말로 20세기 자본주의의 총화이며, 가족이 놓인 자리가 오히려 시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꿈도 자본주의로 꾸고, 저승조차 자본주의로 식민지화할 것!

자본제적 삶의 양식이 소유, 교환, 물화 등속에 결절돼 있다면, 실내화야말로 자본주의적 태도가 수렴되는 특유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聖域化한 것이 오히려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찬찬히 되새겨볼 일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유럽의 도시 아케이드화는 인류의 실내화 역사에서 한 분기점을 이룬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나아갈 행로의 필연적인 한 단계인데, 근년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지구 전체의 아케이드화 역시 그 행로가 품고 있는 음울한 묵시록의 結句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미 지구적 화근으로 떠오른 온난화 현상이야말로 실내화로서의 자연화, 혹은 자연화로서의 실내화라는 인류 최종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특히 21세기의 한국인으로서 주목해야 할 실내화 현상은 단연 청계천 복원이며, 이 점에서 이명박 정권이 명운을 걸 전 국토의 운화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청계천 열광의 배후에는 도시가 시골을 낳아놓을 수 있고 문화가 자연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도착된 文禍的 자신감이 자리한다.

그것은, 다시 벤야민의 지적처럼 시골을 파노라마의 형식으로 도시 속으로 휘감아 들인 것이며, 기 드보르의 비판처럼 시골을 상업주의적으로 스텍타클화한 자본주의적 기교와도 같은 것이다.
(좀바르트의 고전적 분석이 있기도 하지만) 사치품의 실내화라 할만한 현상은 서양의 경우 15~16세기를 지나면서 돌이킬 수 없이 틀을 잡았고, 18세기 조선의 경우에도 특별히 청나라에서 수입해들인 각종각양의
사치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京華士族들에 대한 질책과 선망섞인 논의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세습적 신분이나 가풍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보편적 실내화 현상은 역시 자본제적 삶의 양식이 전일화됨으로써만 가능해진 것이다. 실내화란 곧 실내의 사치화이며 소유화인데 그것은 외부(자연)의 배제와 인위적 조작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일은, 자연의 희생으로만 가능해지는 그 실내화를 자연으로 여기게 될 괴물들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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