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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인문학적 상상력과 교통사 연구
[學而思]인문학적 상상력과 교통사 연구
  • 조병로 / 경기대· 사학
  • 승인 2008.02.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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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들이 필자에게 뭘 연구하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교통사 연구라고 말하곤 한다.  왜냐하면 교통은 사람과 물자를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는 국가의 동맥이기 때문이다. 교통은 물길을 이용한 수상교통과 도로를 사용한 육상교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漕運제도가, 후자는 驛站이 그에 해당한다. 교통이 국가 경영의 중추적 혈맥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다른 역사학 분야보다 매우 부진한 편이어서 사실 학계 담론의 중심에서 벗어나 이슈를 선점할 만한 주제도 되지 못했다.

필자가 교통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시골의 비포장도로에서 자전거나 우마차를 이용해 통학을 해오다가 계획된 도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처음 버스와 기차를 타면서다. 당시의 증기기관차는 맨 처음 접촉한 문명의 이기였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키보다 큰 열차는 뇌리에 크게 각인됐다. 고교시절 변호사, 농학자의 꿈을 뒤로 하고 대학에 들어와서 지도교수의 조운과 역참에 대한 연구를 수용하면서 교통사 연구 분야는 내 인생의 운명과 같이 돼버렸다. 학부 때에는 요즈음 쟁점이 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와 관련이 깊은 조운을 공부했으나, 선행의 연구자가 있어 육상교통사 연구로 선회했다.

역참은 30리마다 1개의 역을 설치해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왕래하는 사신과 나그네에게 숙박과 마필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교통, 통신기관이었다. 조선왕조를 지탱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추기관이요 오늘날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통제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료의 확보와 역참시설물이 남아 있어야 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편년체 사서가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역의 실제 모습이나 운영하면서 기록한 문서가 남아있지 않는 한 연구에 한계가 너무 많은 실정이었다.

그러나 실록이나 등록류의 기본사료를 발췌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驛誌나 읍지邑誌, 고지도와 역의 인적구성을 살필 수 있는 호구대장 발굴을 위해 오랫동안 국내외를 섭렵했다. 그 결과 규장각에 보관중인 경상, 호남지역 등의 역지를 발굴하게 됐고 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운영 실태를 파악하게 돼 답보상태인 연구의 활성화를 촉진하게 됐다. 특히 일본 효고현(兵庫縣)의 벽촌에서 한 개인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호구대장, 즉 ‘김천도·송라도형지안’의 발굴은 필자가 거의 20여년간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쾌거였다.

 
이 자료는 18세기 경상도 김천역과 송라역에서 종사하고 있는 역사람들을 연구하는데 둘도 없는 귀중한 사료로써 150여년 전에 한지무역을 해 온 지방 다이묘 집안에서 보관해 온 것이라 한다. 필자가 이 고문서를 접하는 순간처럼 학문하는 즐거움과 유열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 때 학문적 무관심과 비인기 주제에 대한 절망 속에서 내팽개치려 했던 교통사 연구는 이렇게 다시 살아나 인문학적 상상력과 학문적 호기심을 다시 자극하게 돼 거의 25여 년간 연구한 결과물인 『한국근세 역제사연구』라는 저서를 세상에 내놓게 됐다.

일찍이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劉知幾)는 ‘사학자는 才, 學, 識의 세 가지 재주(三長之才)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는 역사적 재주요, ‘학’은 박학다식, 그리고 ‘식’은 시비곡직을 판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유지기의 이 말은 역사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귀담아 들어야할 명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병로 / 경기대·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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