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7:20 (일)
[學而思]사회국가를 위한 사회적 상상력
[學而思]사회국가를 위한 사회적 상상력
  • 전태국/강원대·사회학
  • 승인 2007.12.31 23:2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생의 항로에 소싯적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경우가 적지 않다. 나의 학문경로도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중학생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에 부친이 부산의 육군형무소에 끌려갔다. 아버님은 4·19후 결성된 교원노동조합의 부산시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부친이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요시찰대상에서 제외됨을 알린다는 편지를 받은 것은 한참 후인 내가 대학원생 때였다. 국가의 폭력성을 절감케 한 이러한 소싯적 경험은 어린 나에게 사회에 대해 분노와 불만을 갖게 한 계기였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 온갖 사전을 들추어보면서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연구하는 학문이 사회학이란 걸 알게 돼 지망했다. 그러나 국가의 폭력성을 제거하고 품위 있고 안정된 시민생활이 보장되는 사회를 희구하는 나의 관심은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는 채워지지 않았다. 자연히 혼자서 스스로 관련 책을 구해 읽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분단의 냉전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린 여러 사건들이 나의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소싯적에 그리고 대학생 때 겪은 이러한 경험은 나의 지적 관심을 무엇보다도 분단을 부추기는 ‘이데올로기 곤봉’에 향하게 했다.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명저를 접해 사회학을 선택한 동기가 충족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만하임을 통해서 마르크스를 보다 깊이 알게 됐고, 이어 마르크스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다. 특히 학내 연구실에서 독일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독일 사회학에 지향된 나의 관심은 마침내 독일 유학을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연구관심은 국가의 폭력성과 관련해 지배와 이데올로기 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지식사회학적 연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민의 품위 있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사회국가(Sozialstaat)에 대한 연구로 확대됐다. 사회국가란 말 자체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낯선 용어이다.

사회국가의 요체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사회국가는 시장자본주의에 의해 발생한 불안과 배제를 시장독립적인 국가의 개입을 통해 감소시키는 것을 원리로 한다. 사회국가는 시장자본주의 경제와의 공생 속에서 자신의 고유논리를 전개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시장을 대신하거나 혹은 시장에 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장과 함께 존재한다.

둘째로, 국가행위의 핵심은 ‘사회성’이 전체 사회를 관통하게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사회성’은 두 가지 국가의무를 가리킨다. 하나는 사회적 약자와 강자 간의 격차를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사회적 균등’의 의무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의 기본권과 욕구를 시장의 힘의 작용으로부터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의 의무이다. 따라서 사회국가의 행동영역은 좁은 의미에서 사회보험과 사회부조에 그치지 않고 건강, 교육, 주거를 비롯해 환경, 여가, 교통, 도시계획도 포함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회국가는 법국가(Rechtsstaat)와 대립하지 않는다. 사회국가의 이상은 법국가의 형태 안에서 실현된다. 이를 무시한 극단적인 경우에 사회국가는 모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권위주의적인 부양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국가는 개인의 자유의 법국가적 원리가 ‘사회적’인 것의 희생위에서 실현되는 것을 방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국가의 원리가 개인적 자아전개의 자유공간을 질식시키는 것도 방지해야 한다.

오늘날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집권당이 사회민주당이든 기독민주당이든 상관없이 사회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신자유주의를 강조함으로써 헌법의 기본원리인 사회국가의 이념이 심각하게 억압되고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전체 근로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에 처해있는 오늘의 상황은 사회국가의 건설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부조에 초점을 둔 좁은 ‘복지국가’ 체제를 넘어 시민의 일반적 삶에 품위와 안전을 부여하는 사회국가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사회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전태국/강원대·사회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무명씨 2008-01-07 10:45:26
사회국가의 이상을 추구하시는 전 교수님의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