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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새주소, 도로명 그리고 인문학자
[學而思]새주소, 도로명 그리고 인문학자
  • 교수신문
  • 승인 2007.12.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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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 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이 공포돼 금년 4월 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가까이 사용해 온 土地 地番에 의한 住所體系가 道路名과 建物番號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住所로 전면 개편됐다. 시행 과정에서의 혼란을 막기 위해 5년간은 지번을 바탕으로 한 옛 주소와 함께 쓰기로 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법적 주소는 도로명 주소이다.

토지 지번에 의한 옛 주소체계는 1910년대 日帝가 土地收奪과 租稅徵收를 목적으로 만든 地籍制度에 의한 것으로 이 방식을 따르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OECD 국가들은 물론 중국, 북한도 도로명에 의한 주소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지번 중심 주소제도의 원조인 일본도 1962년 이후 블록방식 또는 도로명에 의한 주소체계를 도입했다. 이는 도로명 중심의 주소체계가 지번 중심의 주소체계보다 경쟁력이 있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토지 지번에 의한 주소제도가 불합리하게 된 것은 都市의 膨脹, 都市構造의 變化에 따라 토지의 分割, 合倂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지번 배열이 무질서하고 복잡하게 됐기 때문이다. 토지의 지번 중 부번 부여는 분할 순서에 의해 결정되므로 43-1번지 다음에 43-2번지가 올 수 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43-200번지가 올 수 있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지역일수록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國民生活의 不便을 해소하고 나아가 國家競爭力을 强化함은 물론 國際的으로 普遍化된 도로명 주소체계를 도입하려는 국가의 정책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를 위해 문민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준비해 온 국가적인 정책과제가 이제 실제로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오게 됐다. 그러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도로의 이름 중 잘 다듬어지지 못한 명칭이 눈에 띄고 정보력 또한 갖추지 못하고 있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새주소 사업을 준비함에 있어 각 부문을 모두 중요시해야 하겠지만 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부문은 도로명 부여이다. 명판 제작과 설치, 도로망 체계 구축 등은 잘못되면 즉시 시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로의 명칭은 한 번 부여하면 永續的으로 사용해야 할 이름이다. 도로명도 지명의 일종이므로 한 번 부여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명이 保守的이라는 것은 미국의 상당수 주 이름이 정복자의 언어가 아닌 원주민의 언어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언어로 돼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오클라호마’는 인디언어로 ‘赤人’이라는 뜻이며 ‘미시간’은 ‘큰물’, ‘미시시피’는 ‘물의 아버지’라는 피지배족의 언어가 미국의 주명이 된 것이다.

일단 명명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쉽게 고치기 어려운 것이 지명이듯이 지명의 일종인 도로명 또한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도로명을 비롯한 지명어는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되는데 ‘감나무골’은 ‘감나무+골’로 ‘다람쥐길’은 ‘다람쥐+길’로 분석된다. 이 때 우리는 뒤에 있는 ‘-골, -길’을 분류요소, 앞에 있는 ‘감나무-, 다람쥐-’를 성격요소라 한다. 도로명을 지을 때 이러한 지명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심도 있는 학술적 검토가 부족했기에 분류요소에서 담을 수 있는 도로의 위계정보와 전부요소에서 보여줘야 할 성격부여가 매우 부족했다.

道路名 附與에서 언어 전문가 즉 국어학자나 地名言語學者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구가 있었다면 보다 나은

방안이 마련됐을 것이다. 앞으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는 어떤 政策을 시행함에 있어 言語와 관련된 문제가 개입돼 있을 경우 반드시 言語學者를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연구실에만 머물러 있던 人文學者들도 ‘學問을 위한 學問’에만 머물지 말고 ‘人間과 社會를 위한 學問’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박병철 / 서원대 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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