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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데자뷰 또는 갈증
[문화비평]데자뷰 또는 갈증
  • 김현식/한양대·역사학
  • 승인 2007.09.10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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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데자뷰다.
똑같은 것들과의 만남이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고, 스쳐 지나는 여인네의 옷차림과 얼굴은 이미 어디서 본 것들이다. 가깝다는 말은 아니다. 오래 알아 아늑한 친밀감이 커간다는 말이 아니다. 기묘하고 오히려 생경하다.
모듈(module)의 낯선 거리, 각종 클립(clip)의 행렬.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끼워 맞춰 조립하기이다.
‘포장’의 ‘스펙터클’이다. 사운드카드를 바꿔, 낡은 스테레오 사운드를 5.1 또는 7.1의 입체 사운드로 진화시키듯, 우린 눈과 코를 바꿔 아름다움을 업그레이드한다. ‘포토샵’으로 표면을 다듬어, 색조와 색감의‘자연스런’윤기를 꾸며낸다. 스타일로 염색된 각종각색의 이미지. 그래서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그리움이다. ‘한 여름의 이글거리는 열기’를 담기위해 숱하게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려댄 반 고흐의 무식함에 대한 그리움이다.
‘대지를 적시는 비’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구름 속 천둥’으로 울어야했던 니체의 투박함에 대한 그리움이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매트릭스다. 길가에 즐비한 햄버거, 피자, 커피 집. 오늘날 식욕과 갈증은 느껴지는 게 아니다. 눈 돌리면 만나는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그들이 전해주고 만들어주는 것이다. 성욕은 어떠한가.
음식점만큼이나 즐비한 가요방, 주점, 살롱. 또 그만큼이나 빈번한 교외 가도의 여관, 모텔, 호텔.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인공의 삶이다. 자연적이기에 그만큼 본래적이고, 원초적이기에 그만큼 강렬한 것들조차, 자극받아 심어지고 자극받아 소비된다. 그래서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전자레인지의 삶이다.
이젠 3분도 길어, 1분이면 채워지고 소모되는 우리의 레토르트(Retort) 식욕, 레토르트 성욕. 누가 포스트모던을 레디-메이드란 했던가.
그건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끝자락의 모던일 뿐,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어레이디-메이드(Already-made)이다. 신경 구석구석, 감각 구석구석을 데이터베이스화한 자본은 틈새 틈새를 파고들어, 기필코 욕망에 젖어들
상품들을 이미 생산하고 진열한다. 그래서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그리움이다. 어머니의 음식, 어머니의 사랑. 모나면 모난 대로, 둥글면 둥근 대로 다듬어 커져가는 자연에 대한 애잔한 동경이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거죽이다. 오색의 표면이며, 빛나는 키치이다. 대량생산되어, 쇼윈도에 즐비한 모네, 피카소, 클림트. 사이즈가 너무 작다고, 혹 다 팔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3만 원 정도를 더해 삼사일만 기다리면, 원하는 크기의 원하는 작품이 ‘퀵 서비스’된다. 그래서 우리의 포스트모던엔‘이발소 그림’이 없다.‘가화만사성’글씨아래의 젖 물리는 돼지가 없고,‘오늘도 무사히’의 구절아래
기도하는 아이도 없다. 그 대신 모네의 ‘정원’이 있고, 피카소의 ‘소녀’와 클림트의 ‘키스’가 있다.  우린 더 이상 물레방아의 시골 초가를 내걸지 않는다.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되뇌며 기도하는 할아버지를 이제 더 이상 진열하지 않는다. 질(質) 낮다고, 품위 없다고. 그러나 실상은 망각했기 때문이다. 초가집의 기억을, 속아야하는 삶의 절절함을. 그렇기에 포스트모던의 황학동은 서글프다. 롯데캐슬과 삼일 아파트가 그로테스크하게 뒤엉킨 그 곳에선, 미처 못 걷어낸(그러나 곧 사라질) 옛 이발소 그림들이, 삶의 진정성으로 찬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죽지 않는 불빛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소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잊어버린 잠이다. 눈떠도 여전히 피곤한 육체이다. 늘 언제나의 분주함.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새벽부터 또 다른 새벽까지의 지하철이다. 여행도 가지 못하면서, 올라타고 또 올라타는 거짓 기차. 창밖의 졸음 찬 풍광은 파리가 되고 런던이 되나, 깨어나면 서울, 일터이거나 집 앞일 뿐이다. 둥그런 일상, 가끔은 뾰족하길 바라는 圓周 위에서의 달음질. 그렇기에 우리의 포스트모던이란 약간씩 떠오르는 욕망이다. 일탈에의, 미끄러짐에의 갈증이다. 둥근 2호선에서의 만남은 여전히 허허롭기에, 침묵과 눈빛의 만남에 대한 삭지 않는 갈급함이다. 신(神)의 눈동자에 대한 죽지 않는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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