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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공간과 마음
[문화비평]공간과 마음
  • 김영민/철학자
  • 승인 2007.07.09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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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훈화나 이데올로기적 학습의 효과가 우리의 기대치대로라면, 12세기나 혹은 늦어도 19세기 경에 지구는 파라다이스의 꿀맛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갖은 역설(逆說)은 끝이 없고, (실수나 농담이 사물의 질서 속에 각인되었다던 쿤데라적 상상처럼) 부작용은 오히려 문명 그 자체의 질서 속에 각인된 듯하다. 그래서 훈화나 학습은 늘 진리보다는 안정에 기여하는 것으로써 그 숨은 진실을 드러내고, 그 청중과 학생들은 종종 객기와 영웅주의적 불량스러움을 유일한 쾌락으로 삼아 반(反)진실의 진실을 향해 줄달음을 치곤 한다. 이렇게, 통속의 진실은 쾌락을 순치하며, (바타이유의 문법을 빌리면) 진정한 쾌락은 오히려 그 진실을 어기는 범금(犯禁) 속에서 새로운 진실을 잉태한다. 이 같은 일상의 체험은, 이를테면 원자화된 개인 속에서 세속의 진실을 구할 수 없다는 상식에 조응한다. 물론 세속에 물든 인간들에게 이 상식은 이미 상식 이상의 것이다. ‘나는 다르다’는 낭만적 허영에 집착하거나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마조히즘적 나르시스에
허우적거리는 짓으로는 이 상식 이상의 상식에 이를 수 없다. 반복하자면, 도덕적 훈화나 이데올로기적 학습의 사회적 효용이 대체로 실망스러운데도 줄기차게 반복해온 것은, 한편 그것이 기성 권력의 변치 않는 발화방식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나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사람들도 여전히 개인으로서(혹은, 절망적으로, 개인밖에 될 수가 없어!) 상대를 손가락질하지만, 낱낱이 체계화된 우리의 삶터 속에서 상대는 바로 그 손가락질 탓에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조형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 속의 독재자들과 가부장들은 한결같이 ‘(국민)정신개조’의 담론을 떠벌렸지만, 그 개조의 필요성·필연성이란 기껏 그들의 독재적 제도가 만든 원근법적 환상에 불과했다. 이윽고 그 권력제도에 빌붙은 환상이 그 권력의 토대와 함께 균열하면서 타인들의 개조를 지목하던 그 필연성의 타깃은 오히려 자신이 된다.
도덕적 질책은 워낙 공동체의 질서를 규제하던 법식이었다. 혹은 개인들 사이의 사적 관계 속에 사회적 질서가 결절한다고 믿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혹은 절망적으로 고독과 싸우는 소비주의적 개인들이 원자화된 개인의 환상 속에서 여전히 붙들고 있는 유물이다. 이것은 결국 도덕과 종교로써 살찌게 할 수 있다는 개인적 내면성의 환상에 기반한다. 가령, 기계나 노예에게 퍼부어진 그 도덕적 질책의 무용성을 상상해 보시라.
어느 생일축하 자리에서 태몽이 화제에 올랐다. 번갈아 태몽을 얘기하면서 문득 그 형식이나 등장하는 동물들이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변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거창한(!) 태몽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내 판단에, 태몽은 마음속의 어느 깊고 예지적인 의도가 꿈의 이미지로 현전(現前)한 게 아니라 민간 신앙적 문화나 제도를 통해 ‘사후적으로(nachtrglich)’ 재구성된 일종의 도착(倒錯)에 가깝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면을 출발점으로 삼는 관념론적 해석은 종종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다.
푸코의 유명한 설명에 따르면, 16세기 이후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강화된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당대 유럽인들의 성적 정체성이 조형되는 주요한 환경이었다. 이를테면, 고백이나 고해, 혹은 비밀선거의 형식을 두고 말할 수 있듯이, 오히려 ‘밀실구조가 내면성을 가져온다’(가라타니 고진)는 것!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이라는 제도가 무의식이라는 내면적 깊이를 끌어온다는 생각, 그리고 17세기의 사회적 여건과 제도가 아이들 속에도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는 상식을 정착시켰다는 아리에스(P. Aris)의 주장 등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마음의 바깥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근자에 초대받은 어느 한옥의 운치에 매혹된 적이 있다. ‘녹차방’으로 쓴다던 문간방은 그 텅 빈 공간과 함께 참으로 깊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공간은 그 주인 가족의 생활방식이 쉼 없이 스친 흔적으로 단정하게
마모되었고, 그 고아(高雅)한 기색은 그들이 발효시킨 친교의 흔적으로 역력했다. 그 중에서도 진풍경은 그 집 아들인 10살짜리 소년의 차분하고 깊은 눈매였는데, 나는 소년의 얼굴에 드러난 그 ‘마음’풍경을 그 집의 ‘공간’풍경을 빼놓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김영민/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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