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5:40 (일)
[문화비평]‘拙’에 기대어
[문화비평]‘拙’에 기대어
  • 교수신문
  • 승인 2007.06.25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에는 이래저래 ‘말’이 많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는 시조의 구절이 낯설지 않다.
최근 대통령의 ‘말’이 논란거리였다. 생각도 않고 막 해대는 ‘서툰 것’(拙)인지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진 ‘교묘한 것’(巧)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아마도 후자일까. 말로써 편을 갈라 표를 계산해 내는 정치
고수들에게 말은 목표달성의 좋은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최고 권자에 오르면 오만해진다. 아무도 그를 붙들어 맬 수 없고, 諫言조차 먹혀들지 않는다. 그 때, 역사는 권력자의 입과 몸이 獨走한 흔적, 상처투성이로 변한다. 언행이 파당을 낳고 세상을 찌르는 칼날이 된다면, 권력자는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68세의 퇴계는 17세 소년 왕 선조를 위해 <聖學十圖>를 만들어 바친다. 그것을 올리는 글의 앞머리에서 그는 ‘도는 形象이 없고 하늘은 말(言語)이 없다’고 하였다.
國事를 책임 진 자 스스로의 마음가짐 여하에 나라의 존망이 달렸으며, 이치나 하늘이 왕을 제어해주지는 않음을 말한다. 예컨대 ‘고인의 예던 길’과 ‘잠언’을 사방에 써놓고서라도 왕은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며 잠시라도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巧者가 拙者를 이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재주와 기교 있는
자들은 대개 서투르고 모자라는 자들의 종노릇을 한다(拙之奴)”(명심보감)는 말은 본질을 제대로 짚었다. 첨단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앞선듯하나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는 그보다 뒤쳐진 자들에게 희생당하고 있다. “교자는 수고를 해야 하고(巧者勞), 지자는 걱정을 해야 한다(知者憂). 무능한 자(無能者)는 바깥에서 아무 것도 찾는 일이 없으니, 배 불리 먹고 마시며 노닌다. 마치 매여 있지 않은 배가 바람결에 허허로이 떠다니듯
얽매임 없이 노니는 것이다”(장자). 졸은, 교와 상대적으로 쓰이며, ‘졸렬하다’ ‘옹졸하다’ ‘서툴다’ ‘솜씨 없다’ 등의 뜻을 갖는다. 그러나 졸은 ‘예스러우면서도 서툰 맛을 지님(古拙)’, ‘아직 손질하지 않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음(拙樸)’, ‘어린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함(稚拙)’의 뜻도 갖는다.
사회나 정치, 예술에서 말하는 고도의 테크닉 말이다. “위대한 기교는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大巧若拙)”고 했다(노자). 꾸민 흔적 없이 졸렬해 보이는 첨단들. 소박한 들꽃 한 송이가 그렇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꾸불꾸불한 강이 그렇다. 경지에 오른 건축가의 집이 대충 만든 것 같지만 있어 보이고, 싸구려 집이 엄청 꾸며도 뭔가 없어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산수화 한 폭처럼 단순하지만 괜찮아 보이는 것엔 반드시 어떤 원리가 숨어 있다. 졸에 숨은 첨단의 원리, 거기서 힘이 나온다. 그것은 ‘自然’에 닿은 물건의 품격, 삶의 경지가 아닐까. 세상은 巧者의 단물을 다 빨아먹고는 차 버린다. 그러나 拙者는 그런 下手의 그물에 잘 걸리지 않는다. 바로 拙者로 살아가는 법은, 늘 ‘있는 그대로’에 마주하여 그것을 加減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공자가 ‘巧言’을 두고 ‘드물도다! 어짊 (仁)이’라고 한 것은, 말만 번지르르 하는 사람들의 말이 대체로 ‘무언가를 위한’ 겉치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은 어눌하나[訥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민첩한[敏行] 사람들은 언제나 하심하며 침묵하듯 살아간다.
차라리 그들이 세상에 희망을 전해주는 어진 자들 아닌가.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어디가나 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살려는 사람을 모기처럼 물어댄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구겨놓고도 변상은커녕 변명만 태산이다. 지금 우리 세상은 巧/巧者를 지향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拙/拙者가 없다면 세상은 그린벨트나 공원 없이 계획된 공룡도시와 같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밭이 한참 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김을 매지요//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함께 와 자셔도 좋소//왜 사냐건/웃지요’(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처럼 拙은 결코 지식이 아니다. 스스로의 삶으로 보여주는 지혜이다.

최재목/영남대 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