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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예안길과 남산골
[딸깍발이]예안길과 남산골
  • 김형중 / 편집기획위원· 한국외대
  • 승인 2007.06.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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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조카뻘 되는 녀석이 입대하게 되었다고 인사차 들렀다. 서울에서 자란 촌놈이라 예상처럼 백화점 냄새로 그득한 종이쇼핑백에 옷 몇 점을 넣어 달랑 들고 내려왔다. 눈은 총기가 빠져 뿌연 것이 아마도 입소날짜를 받았으니 친구들과 입대를 핑계로 술 마시고 덜렁거리며 야단법석을 일삼다가 우리 집에 잠시 쉬러 왔거니 짐작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들려주는 얘기는 사뭇 달랐다.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시간당 3천2백원)하며 8시간씩 사회경험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녀석에게 시간급 직장은 매우 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급여를 악착같이 모아 생활비로 쓰고 책도 사는 아이들도 많은데 다 이 녀석처럼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학교로 입시학원으로 부모가 태워주는 자동차에 실려 몸을 맡기다가 수도권 대학에 들어가 1년을 C와 D로 깔며 어영부영 시간 때웠다고 가정할 때 이 녀석이 들어간 대학에서 스스로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하며 걱정이 앞섰다.
 다음 날 마침 진도를 끝낸 과목이 있어 바쁜 학기말이지만 반나절 시간을 내야지 하며, 늦잠에 빠진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여 안동으로 갔다. 약 2년 간 학교를 잊고 지내는 군복무이니 일단 경북북부의 서원 중 한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회와 병산서원을 가 보았느냐고 물으니 하회가 어렴풋이 떠오른다는 말에 안동시 도산면으로 갈 요량이었다. 예천읍에서 군청을 찾아 근처에서 작년에 가족과 함께 갔던 집에서 냉면으로 요기하고 나오니, 중절모자의 노신사들이 군청 앞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계신 모습에 놀란 얼굴이었다. 촌노들의 단아함이 예천의 저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북후면을 통해 석탑리(피라미드 형태의 3층 方壇形積石塔)에 있는 불교유적을 간단히 보고 녹전면을 돌아 나와 도산서원을 찾았다. 구부러진 도산서원 접근로 보다는 예안면을 낙동강 건너 볼 수 있는 사라진 예안옛길도 보여주고 싶었다. 아마 지금 주차장까지 마련된 도산서원 접근로보다는 강을 따라 걸어갔던 그 길이 제격이리라. 눈앞에 전개된 차이를 설명하면서 현 문화재청장이 1997년 4월에 쓴 ‘문화유산답사기’ 셋째 권을 건넸다.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때 본 동화나 만화 이외에 읽은 책이 없다”는 솔직한 답변이 나왔다. 이 아이에게 어필할 수 있지만 지금은 폴리싱 타일로 개보수 후 관광지로 정형화된 한양 샌님들이 살았던 남산골보다는 마음먹어야 가볼 수 있는 경북북부가 또 힘이 조금 더 들어도 퇴계 선생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산서원이 내게 더 끌리는 것이다. 서원 내에는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 쓰는 관광객 세 명과 우리 뒤에 도착한 어린아이를 둘러 맨 한 가족이 전부였다. 사진을 한 장 박고 강 건너 예안면이 보이는 사라진 길까지 둘러본 후에 부지런히 영주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어찌 유 (문화재)청장의 답사기나 부석사 스님이 들려준 무량수전 감상법과 같은 엄청난 보물을 혼자만의 것으로 움켜쥐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내 조카아이에게 조상들이 남겨주신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법을 깨닫게 하고 싶었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 속에 이 아이에게는 집게손가락 끝만 살아있었다. 내가 건넨 답사기는 작렬하는 6월의 태양빛을 가리는 가리개로 쓰였다. 돌아오는 길에 코를 골며 잠에 빠진 조카 녀석의 천진무구한 모습에 겹쳐지는 군미필 비율이 1~2위를 겨루는 우리 교수집단의 허위 속에서도 신나게 놀다가 군복무 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뿐인 약속을 믿으면서 12년째 잘 달리는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나는 맹렬히 밟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죽령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홍준이 兄, 요새 아이들이 힘들 때 찾아보고 불러볼 ‘유홍준’이 어디 있수?”  

김형중 / 편집기획위원· 한국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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