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고구마 순을 심으며
[딸깍발이]고구마 순을 심으며
  • 김형중 / 편집기획위원· 한국외대
  • 승인 2007.05.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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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은 촉촉한 주말비와 함께 지나갔다. 산행을 즐기는 주말등산객이나 야외촬영에 빠져든 아마추어 사진작가를 빼고 땅에 씨앗을 뿌려 풍족한 가을을 기대하는 농부들은 은근히 기쁜 눈치였다. 2003년 봄 역시 겨울먼지를 씻어내듯 푼푼한 강우량 때문에 산과 들에 만발한 야생화를 구경하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 봄에는 못 미치나 내가 사는 강원도 산기슭에는 야생화가 사방팔방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다.
우리집에서 약 오 십리 떨어진 황둔에 사는 딸부자집 유선생이 옆집 소를 빌려 갈아놓은 언덕 밑 밭 몇 고랑을 내어 주었다. 유씨 부인은 고구마를 추천하면서 두세 고랑만 일구면 가을에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를 실컷 먹는다고 일러주었다. 조각밭에 고구마, 고추, 방울토마토, 치커리 순을 심었다. 마침 주말비가 잦아들던 토요일 오후자락이어서 모처럼 우리 가족은 흙냄새에 흠뻑 젖어들었다. 초등학교 일학년인 유선생 막내딸은 우리 아이들과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아이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밭고랑에서 이리저리 뛰는 동안 꽂아놓은 방울토마토 꽃대에 곧 열릴 동그란 열매가 보이는 듯 했다. 유씨 부인이 마련해준 구수한 칼국수 한 그릇에 즐거운 저녁시간이 뉴스가 끝날 무렵까지 이어졌다.
서울서 직장생활하다 주말을 보내려고 내려온 두 딸은 다음날 새벽 아빠를 도와 모내기를 하기로 했다. 벼를 수확하면 딸에게 보내주기로 한 유선생과 모처럼 농사일을 거드니 어깨가 아파 30분을 더 자고 6시부터 일해야 한다는 큰 딸의 투정 속에 그 댁에서 피어나는 깊은 애정과 배려가 녹아있었다. 또 장칼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12명의 식탁을 물리며 검소가 몸에 배어 있는 유선생의 질박한 생활은 유씨 부인이 냉장고에서 꺼내 덜어준 참두릅 순 한 봉지에 묻어나는 넉넉함에서 절정을 보여주었다.
몇 년 전 집 앞 텃밭을 빌려 고구마 순을 심었을 때가 생각났다. 고랑에 꽂아두고 물을 주면 살아난다고 했는데, 유씨 부인은 “한 뼘 이상 깊게 파야 혀” 그런 후 흙을 긁어모아 두둑이 덮으란다. 혼자 말로 “아하, 지역이나 밭의 높이에 따라 심는 방법도 다른 모양이지”하고 중얼거렸다.
최근 십 년 넘게 이 대학 저 대학에서 동가식서가숙을 일삼으며 학생들을 만난 나는 어떤 곳은 간단히 꽂아두어도 알아서 잘 자라는 순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깊게 파 종자를 묻고 흙을 덮어 눌러주어야 뿌리가 잘 내리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각 학교가 지닌 전통의 모습과 흔들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전해준 정신적 가치는 귀했다. 그 속에서 배우고, 느끼고 또 학교울타리를 건너 사회로 젊은이들이 헤치고 나온다. 그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거의 다 몰라도 용기를 내어 격려와 관심을 쏟으면 어느 곳이든지 순수한 영혼을 지닌 학생들이 “선생님, 가슴이 따스해졌어요”라고 반응하곤 했다.
내가 맡은 강의는 주로 영어와 어학에 관련 된 과목인데, 개설강좌 과반수이상을 리포트가방을 둘러맨 외래강사나 조용히 앉아 학생들의 중간시험을 채점할 방 한 칸 없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담당하는 열악함이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그들의 삶이 고달프고 학생들에게 나눠줄 생명수가 고갈되는 악조건들을 여기에 다시 적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에까지 불어 닥친 영어광풍을 목격하면서, 경희대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지도하고 있는 H선생님은 영어로 강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영어학을 가르치는 교수 중에 학생들이나 다른 교수들 앞에서 “영

어로 강의할 수 있는 사람 몇 안 되지”하며 쓴웃음 짓던 모습이 기억났다.
이번 여름에는 장맛비가 세차게 밭고랑을 때리기 전에 지난 주말 심어놓은 고구마 넝쿨줄기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튼실한 원뿌리에 호박고구마, 밤고구마가 달리도록 애써야겠다. 황둔 사는 유씨 부인이 “저 먹물들, 내가 한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네 그려”하며 강원도의 구수한 미소로 답할 것이다.     

김형중 / 편집기획위원· 한국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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