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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샌님들을 위한 변명
[딸깍발이]샌님들을 위한 변명
  • 전진성[편집기획위원· 부산교대]
  • 승인 2007.05.06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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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작은 그릇’으로 살아가기에 대한민국은 너무 벅찬 곳이다. ‘큰 그릇’을 지닌 인물들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신문지상을 연일 도배하고 있는 ‘대권(!)’주자님들은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정말 큰 인물들이 많다. 대박 아니면 파산의 양자택일을 감행했던 배포 큰 재벌 총수님들,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해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던 민주투사님들, 기득권 세력이 유포한 모든 허위적 통념에 결연히 맞섰던 ‘문화 게릴라’님들. 이런 불세출의 영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시시하게 작은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넘나들며 큰 원칙을 제시하는 명망가님들 덕분에 우리 학계는 현실 사회의 요구와 국제 학계의 조류에 보조를 맞추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비범한 분들의 행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숙연해지며 심리적 위축마저 느낀다. 통렬한 사회 비판과 선명한 정치적 입장, 이에 상응하는 활동 경력, 여기에 더하여 최신의 이론들에 대한 섭렵, 이는 골방의 샌님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들이다. 이 역할을 책임져주실 분들이 적지 않은 점은 다행이지만 어쩐지 골방 학자로서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목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특히 학자들이란 사소한 ‘인정 투쟁’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다. 어찌 골방 샌님들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나마 인정받는 길이라고는 주어진 자리에 앉아 일상적 노동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샌님들도 세상에 대해 할 말은 있다. 당신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당신들이 참여하는 정치, 당신들이 추구하는 정의, 당신들이 떠벌리는 이론이 모든 것은 아니라고. 당신들처럼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원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애써 밝히고 있는 소박한 진리들은 오히려 삶의 진실에 한층 다가서 있다고. 이는 열등한 자들의 목멘 소리만은 아니다. 범용한 이들의 일상적 노동이 홀대받는 사회 풍토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는 앞만 보고 달려온 사회이다. 남보다 한 걸음 먼저 내딛는 것은 이 사회가 추구하는 본원적 에토스이다. 이는 사회를 관리하는 쪽뿐만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는 쪽에도 예외 없이 해당된다. 한국 지식인층의 주된 관심은 누가 사회 비판을 선점하는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소소한 일상적 노동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이론이나 문제의식이라도 일단 터뜨리고 보는 게 순서이다.
벌써 한물 지나긴 했지만 한때 ‘탈주’의 철학이 번성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의 철학적 가치와는 별개로, 과연 우리 사회의 제반 여건이 ‘탈주’를 요할 만큼 그렇게 견고한지에 대해 묻고 싶다. 아예 오갈 데 없는 고아에게 어떻게 가출이 가능한가. 우리는 벌써 ‘아카데미즘’의 폐해를 논할 정도로 그렇게 견실한 학문적 토대

를 쌓았는가. 빌려온 문제의식, 과장된 선명성, 전복적 이론 그리고 이를 품을 만큼 ‘큰 그릇’의 명망가들 대신에 주어진 자리에서 착실하게 일하는 답답한 샌님들이 아쉬운 것은 낡은 아카데미즘을 떨치지 못하는 ‘작은 그릇’의 소치일까.

전진성 / 편집기획위원· 부산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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