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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닙니다”
  • 김상준 경희대
  • 승인 2007.04.30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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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버지니아 공대 사건을 보고 / 김상준 경희대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 돌풍처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불과 일주일. 하늘은 다시 청명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인의 마음에 실로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 동시에 실로 많은 것을 날려 보내고 갔다. 이젠 결코 모든 것이 돌풍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한국인임’이라는 말에 끼어있던 과체중과 거품이 돌풍 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조승희가 ‘한인’이라 하여 느꼈다고 했던 ‘한국인의 집단죄의식’(뉴욕타임즈)이 과연 윤리적인 것이었던가. ‘우리가 남이가’의 반대쪽 얼굴이지 않았는가. ‘한국인’ 소동을 주도했던 언론과 정부가 우려했던 것은 ‘국가위상타격’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미국에게 밉보여 손해를 볼까두려웠던 것 아닌가. 떳떳이 말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이익을 위해 은밀하게 뭉치자는 것이 ‘우리가 남이가’라면, 마찬가지로 혹시나 힘센 자의 비위를 거스르지나 않았을까 우리 모두 전전긍긍(뭉쳐서!) 조심하자 하였던 것이 ‘국가위상-국가사과’ 해프닝의 내밀한 속셈이었지 않았는가. 놀랍게도 생명을 잃은 자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위로는 한국 언론의 그 많았던 기사들 중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막상 미국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국인들의 과잉반응, 과잉의식의 실체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他者에 대한 진정한 윤리적 관심과 “‘한국인임’에 끼어있던 과체중과 거품”은 반비례한다. 조승희 역시 그런 타자였다. 범죄를 저지른 그는 떼어내고 부정해야 할 존재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미국에서 성공한 ‘혼혈한인’은 한국에서 스타가 돼서 요란하게 뜬다. 같은 시간 거리를 떠도는 불우한 혼혈아들은 여전히 비하되고 거부된다. 성인이 되어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입양아’들에 대해 언론은 요란한 조명을 비추지만 그것은 ‘그들이 우리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자족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선진국’으로 실려 갔던 ‘그들’이 결국 ‘고국’을 찾았구나, ‘우리의 품’으로 되돌아 왔구나! 그들이 혈육을 만나 흘리는 눈물은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내면의 콤플렉스를 씻기 위해 ‘집단적으로’ 소비될 따름이다. 그들이 ‘나는 한국인이다’ 동시에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듣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두 진실의 양립 내면에 실린 가슴 저린 생애사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정말이지 찾아보기 어렵다. 

떼어내야 할 것은 “‘한국인임’에 끼어있던 과체중과 거품”이고, 품어야 할 것은 그러한 과체중과 거품이 떼어내려고 했던 조승희, 거리들 떠도는 불우한 혼혈아들, 그리고 ‘그들의 나라’에서의 입양아들의 생애사다. 그러한 타자에게 진정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입양인 문학에서 되풀이 되는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인인 아니다’라는 양립을 우리 자신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 자신 ‘토종’ 한국인들이 그런 양립을 우리 내부에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너무 비대한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의 과체중을 빼고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아사상태의 정체성에 살을 주어야 한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불의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 그리고 그 가족과 친우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와 공감도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정체성이 분명할 때 생길 일이다. 이번 사건을 보며 내심 정말로 놀랐던 것은 이 사건 피해자 가족 친지들의 태도였다. 학교 당국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인 조승희의 묘석도 세웠다. 조문객들은 조승희의 묘석을 훼손하기는커녕 그 위에도 꽃과 편지를 남겼다. 피해자 가족과 친구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자식, 친구를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은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어떤 보상이 가능하겠는가. 그런 성격의 부조리와 부정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다. 그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깊고 처절할지 우리는 다는 이해 못하더라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분노의 감정을 격렬하게 토해내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전해진 눈물이 흐르는 그들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통과 슬픔으로 꺼질듯 부서졌지만 분노와 원망의 푸른 서슬은 어느 구석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래서 그 전체로 억제하지 못할 이상한 감동과 아름다움을 주는 얼굴이다. 이 모습 속에서 ‘미국인’ 이상의 그들, 미국인이 아닌 그들, 인간의 모습을 본다.  

한국인임과 한국인이 아님의 정체성이 병립할 것이듯, 미국인임과 미국인이 아님의 정체성 역시 그렇다. 그들의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사태 대처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경탄과 함께 무섭다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대학 공동체의 위기 앞에 그들은 슬픔을 눅이고 단 일주일만에 정상을 회복했다. 그 문제 많았던 플로리다 개표 논란 위에서 임기를 시작한 부시 정권에 미국인들이 일치된 힘을 실어주는 것을 보고 느꼈던 무섭다는 느낌과도 흡사한 것이 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의 힘이다. 여기에 대한 내 느낌은 양가적이다. 그러나 부서지는 고통과 슬픔을 고요히 내면화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내 감정에는 어떤 양가성도 없었다. 그것은 칸트가 말한 바의 의미에서의 순수한 도덕적 ‘존경’의 감정이었다. 그런 순수한 감정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가. 그러한 모습 앞에 조승희가 한국피를 가져서 미안합니다라고 ‘사죄’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엉뚱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들의 눈물 흐르는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김상준 / 경희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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