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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토플 응시권을 사재기 하는 나라
[대학정론]토플 응시권을 사재기 하는 나라
  • 교수신문
  • 승인 2007.04.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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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을 보면 허생이 말총등 필수품을 매점매석하여 누거만의 부자가 되는 과정이 나온다.  사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성향은 동서고금의 구별이 없고 그 대상이 되는 “영광”을 누린 재화도 다양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는 면화를 사재기해서 돈을 벌었고, 외환위기 시절 약삭빠른 사람은 달러를 사재기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토플 응시권을 사재기하는 역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인터넷으로만 토플시험을 신청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이유에선가 접속이 장애를 일으키면서 내년도 외고 입시를 겨냥한 학부모와 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고, 급기야 네티즌 사이에서는 토플 응시권을 웃돈을 주고 거래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토플 응시권 사재기는 미국의 토플시험 주관사인 ETS의 부사장이 급거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시험장소 공급확대를 약속하고, 외고 교장님들이 모여 향후 토플 이외에 별도의 영어시험 방식을 모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수면 하로 잠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재 우리나라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이 처한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해프닝이었다.
소위 3不 정책으로 알려진, 대학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중에서 기여입학제는 제외하더라도 2不은 현재 사실상 붕괴한 정책이다. 대학은 심층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기형적인 본고사를 부활시킨 지 오래고, 이번에 문제가 된 외고는 과학고와 함께 당초의 설립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고교 평준화의 예외를 입증하는 산 증거들이다.
이제는 이런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  왜냐 하면 그래야 그 부작용을 사심 없는 눈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세칭 일류대학은 서울출신, 그것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강남권 학생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지방의 가난한 집 아들딸은 감히 이들 대학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 지 오래다. 교육의 양극화를 방지하려는 당초의 정책 취지가 달성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대학본고사도 풀고 고교 간에 등급 격차가 존재하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다만 교육의 양극화가 대물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안이 가난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위한 훌륭한 공립학교를 주요 거점 도시별로 적어도 하나씩 설립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수월성도 추구하고 교육의 양극화도 방지하는 보다 나은 대안이다. 미국이 “우수한 학생들을 자석처럼 끌어 들이는 좋은 공립학교”라는 의미의 마그넷 학교(magnet school)를 다수 운용하는 것은 좋은 타산지석이다.

전성인 / 논설위원·홍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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