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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진실
비평의 진실
  • 김영민 철학자
  • 승인 2007.04.17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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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문화비평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송재학은 그의 근작 산문집 <풍경의 비밀>(2006)에서 '풍경에는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풍경론은 하이데거나 고진의 것보다 당연히 시적이다.) 1992년 늦가을의 어느 숲 속 산책에서 얻은 깨침이라는데, 그 설명은 언거번거한 이론없이 간결하다. 요컨대, 그 숲이 하필 시인에게 스스로를 열어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리한 탓에 더욱 문을 닫아버린 풍경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모아온 책들을 버리는 시인의 마음---그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시가 실린 문예지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린다---앞에서 풍경은 자신의 비밀을 털고 그 속내를 고백했다는 것이다.

송재학의 깨침 혹은 시적 전언은, 풍경의 진실이 인간의 의도나 그 오연(傲然)한 지적 관심에 쉽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두고, 하이데거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존재가 말을 걸고 책이 자신을 쓴다는 지랄(知剌)에 비견할 일도 아니다. 다만 대상의 진상은 베이컨-데카르트 식의 계획적 적극성만으로 그 전모를 다 포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혹은,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무서운) 진실은 눈을 부릅뜬 채 마주볼 수 없다는 것!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2006)은, 스스로의 삶에서 억압되거나 은폐된 진실이 타인의 삶을 엿보는 도청의 작업을 통해 슬며시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되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타인의 삶을 도청, 감시하는 그 '능동성' 속에서 되레 자신은 바뀌지 않고 삶의 진실은 뻔뻔스레 물러난다. 그러나 도청장치 앞에 속절없이 노출된 타인의 삶은 오히려 그 '수동성' 속에서 감청자의 삶의 변화시키는 진실을 발신한다. 이처럼 진실은 수동적으로, 에둘러, 그리고 틈을 통해서 새어나오는 것!

알렉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2007) 속의 백인 부부는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서 공유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경험을 통해 극적인 화해에 내몰린다. 총상을 입은 아내를 부축해서 오줌을 뉘는 가운데 둘은 껴안고 울며 각자의 심중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롤로 메이(R. May)에까지 이르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지혜서들은 '진정한 비극을 대면하는 체험은 일면 정화적(淨化的)'이며 따라서 그 참여자들을 화해시킨다는 점을 전한다. 대면과 대화가 반드시 관계의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진실은 종종 외상적 제 3자(비극)의 매개를 통해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빼어난 계보학인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2006) 속에 등장하는 모녀는 대면하기만 하면 싸우고 대화하기만 하면 어긋난다. 역설적이게도, 딸은 어머니가 죽은 후에 그 유품을 챙기면서 공감과 일치의 흔적을 발견한다. 특히 인간 사이의 진실은 빤히 들여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어긋나면서, 뒤늦게 뒤통수를 치는 것!

이처럼 인간들이 엮어낸 관계 속의 진실은 결코 값싸게 읽히지 않는다. 그 모든 진실은 그만한 비용을 요구한다. 한나 아렌트 등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자신의 처지 속에서 자신의 비용을 치르면서 주체화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아이'란, 한 마디로 주체화의 비용을 치르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시인 송재학이 알려준 '풍경의 비밀'도, 그 비밀이 풍경 속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밀은 시인이 시인으로서 치른 삶의 비용 속에 있다; "풍경이 아무렇게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말은, 오히려 그 풍경 앞에 서는 사람(시인)이 치르야 하는 비용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관계 속의 진실은 상대를 향해 눈과 귀만 열어 놓는다고 해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월과 성숙의 비용을 요구하며, 때로는 외상적 체험을 비극적으로 공유하는 우연성을 요구한다. 그 진실은 수동적으로, 에둘러, 그리고 틈을 통해서 새어나오거나, 혹은 어긋나면서, 뒤늦게 뒤통수를 친다.

그렇기에 비평가는 이론가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론보다 한 걸음 더 현실의 착종 속으로 몸을 내미는 비평은 바로 그 탓에 더욱 현실에 즉물적으로 부화뇌동해서는 안된다. 그 현실의 진실이 이론으로부터 부끄럽게, 혹은 무섭게 몸을 사리고 물러서는 자리 속으로 비평은 수동적으로, 느리게, 엿보며, 어긋나면서, 뒤늦게, 이드거니 찾아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김영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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