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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토론문화가 아쉽다
성숙한 토론문화가 아쉽다
  • 남기탁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7.04.16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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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적인 쟁점들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가 目睹하는 것은 토론문화의 빈곤이다. 예컨대 ‘백분토론’이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두부를 자르듯이 그렇게 명백히 찬성과 반대로 진영이 나뉠 수 있는지. 그토록 오래 서로 수많은 논거와 논전을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결론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논객들의 면모도 ‘그 나물에 그 반찬’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의 지성계가 그토록 빈곤하다는 것일까. ‘백분토론’이지만 ‘백분’에 끝나는 적도 없다. 두 마리의 염소가 외나무다리에서 무한히 서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황새와 조개가 서로의 약점만을 물고서 무던히 버티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FTA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런 거대한 국가적인 사안마저도, 그들에게는 ‘2+2=4’처럼 간단하다. 한쪽에서는 말 그대로 ‘開國 공신’으로 추앙받는 협상단이 다른 쪽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된다.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국가의 미래를 놓고, 함께 머리를 모으는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때로 내게는 FTA가 초래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이러한 토론문화의 결핍이 더 무섭게 느껴지곤 한다. ‘백분토론’이 끝나는 새벽에 남는 것은 주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논객들이 남긴 극과 극의 말씀들뿐이다.

 그러니, 그런 씨잘 데 없는 토론들은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직접 나서서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사람도 간간히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그 지지부진한 토론이 사실은 총알 하나를 대신하는 일임을 믿는다. 총알 하나로 간단히 해결할 일을 우리는 밤을 새워 토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토론문화란 게 생겨난 것도 우리에겐 그렇게 오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이 지지부진한 토론들을 사랑한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흔히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은 ‘원탁’으로 表象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것은 원탁이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마주보는 탁자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사안마다 두 개의 진영을 만들어서 싸워왔다.

거기에 사회자가 중재에 나서긴 하지만, 늘 역부족이다. 어쩌면 우리는 토론에 대해서 하나만 알고 다른 하나를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책에서 논쟁을 하다가 상대방이 칼을 뽑아들었다면 그때는 우리도 칼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토론은 혀로 싸우는 싸움의 일종이다. 싸움이니 당연히 이겨야한다. 제멋대로 우기거나, 감정에 호소하거나, 자료를 왜곡하거나, 편을 나눠서라도 이기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토론은 동시에 ‘협력적인 사고’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견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이되, 같은 목적을 위해 힘을 모으는 일인 것이다. 이는 현실을 무시한 낭만적인 생각일 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세 치 혀’ 끝에서 꿈틀대는 독사doxa들, 그 집요한 갑론을박 속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수많은 나라들과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은 토론거리들이 한꺼번에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기탁/ 편집기획위원· 강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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