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2:55 (금)
낭만괴짜 교수를 찾아서
낭만괴짜 교수를 찾아서
  • 김용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7.03.31 15: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초반 학교 안에는 전투경찰이 들어와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우리들을 힐끔거리곤 했다. 우리는 이들을 짭새라 불렀다. 짭새들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데모를 시작하면 닭장차라 불리는 검은 짚차 안으로 학생들을 끌고 갔다.

어느날 3층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학관 앞에서 학생들의 비명과 웅성거림이 귀를 찔렀다. 수업을 하던 학생들과 교수님은 곧바로 창문가로 달려갔다. 학관 앞 마당에 수많은 여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짭새가 달려오자 스크럼이 무너졌다. 학생들은 흩어졌다. 여학생들은 짭새에게 머리채를 잡혀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지르며 닭장차로 질질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모꾼과 구경꾼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창문가의 우리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교수님도 울었다. 닭장차 안으로 끌려가면 끝이었다. 그 어둡고 둔탁한 문이 한 번 꽝하고 닫히면 그들은 모두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렇게 하여 80년대는 실종과 눈물로 밥 말아먹는 시절을 보냈다.

아하, 지금 내가 386의 지겨운 운동권 후일담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당시 우리학과에 계시던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하얀 백발을 단발로 자르고 유관순 누나가 입는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교수님의 독특한 풍모와 또랑또랑한 목소리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상징이었다. 때로 강의실에서 민요를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손으로 나무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고 민요를 따라 불렀다. 나는 당시 그것이 대학이라 생각했다. 대학교수라 여겼다. 닭장차로 여학생들이 머리채가 잡혀 끌려갈 때 교수님은 창가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죽일 놈들 죽일 놈들......”하고 소리쳤다.

교수님은 파출소로 달려가 잡혀간 학우들을 붙잡고 또 우셨다. 시대는 우리에게 마치 모든 말들을 빼앗아간 것 같았다. 우리는 실어증에 걸린 듯 입을 틀어막았다. 어떤 발언을 공식화하지 않아도 교수와 학생은 함께 우는 것으로 시대를 공유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커밍아웃하자면 나는 스승의 날 기념식이나 사은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 앞에서 마음이 괴로웠다. 청년실업을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때만 되면 나는 대학교수를 ‘직업’으로서 ‘밥벌이’로서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직업중의 하나로, 생계를 위한 매개로. 학생에 대한 열정과, 지식과 가르침에 대한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시스템은 교수를 지식전달자, 교육서비스종사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하긴 한국에서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권 하의 교육체제를 한번도 벗어나면 안된다. 학부를 높은 학점으로 졸업하고 지도교수의 마음에 잘 맞추어 논문을 써야 한다. 어쩌다가 고등학교 때 일을 쳐 검정고시출신이라도 되면 그는 뜻을 접어야 한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말 잘 듣고 순종하는 국민을 키워내는 국가 집단이데올로기의 향연장 같다. 하여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학위를 받으면 받을수록 낭만적 야수성은 거세된다. 학습된 교양과 체제에 순응한 모범생들이 주형틀에 찍힌 듯 생산된다.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자본시스템에서 대학 교수는 점점 조직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점점 직업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대학은 점점 더 보수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낭만과 괴짜스러움 혹은 기행으로 시대의 경박함을 비웃던 과거 대학교수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숨죽인 채 체제에 종속되는 아니 이바지하는 또 다른 실어증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나를 의심한다.

김용희/ 편집기획위원` 평택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