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2:50 (토)
문화비평
문화비평
  • 최재목 영남대 철학
  • 승인 2007.03.26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합, ‘사이(間)’의 經營에서

전공’이 무엇인가를 말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대학에선 이미 복수전공, 부전공이 보편화되어 있고, 학과·학문 간의 과감한 통합도 슬슬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分科之學이 지닌 경험적 이력, 知緣의 족보와 같은 업보는 자신 이외의 것을 타자화·배제하기 일쑤이다. 自他不二의 大我의 길을 걷기 위해선 개별 장르마다 부착된 배타적 인자들을 다른 장르와 호환 가능한 초기적 상태로 만들어가는 修行이 필요하다.

그러면 과연 학문의 개별 장르는 각기 지닌 그 業障을 어떻게 분해하여 상호 융합의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자연의 쟁기’,  ‘지구의 창자’라고도 불리는 지렁이에 잠시 주목해보자. 지렁이는 각 마디 배 쪽에 구멍(胚孔)이 있어 끈끈한 액체(오줌)를 내뿜는다.

이것은 비료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살균작용 등도 한다. 지렁이는 농경지의 유기물과 흙을 먹어 분해한다. 이것을 똥으로 배출하는데 토양을 개선하고 작물에 비료분을 공급하는 기능을 한다. 지렁이는 쉼 없이 이리저리 꿈틀대면서 땅을 파고 다닌다.

따라서 흙을 미세하게 갈아주어 바람을 잘 통하게 하고, 비료분과 물이 이동하는 통로로 이용된다. 뿌리와 각종 토양미생물도 이 구멍을 통해 움직인다. 지렁이가 죽을 경우, 그 사체는 최고의 즉효성 비료가 된다.

지렁이는 잡식성으로 폐지나 음식물 찌꺼기·생활하수 등 각종 폐기물을 깨끗하게 먹어치우고 게다가 냄새까지도 없애는 탈취제 역할까지 한다. 이 점에 착안해 국내외에서 산업용으로 활용한다. 학문의 통합, 통섭에도 이러한 지렁이의 역할을 하는 주요 인자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영주의 紹修書院에 가면 소박한 자태의 學求齋가 있다. 儒生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잘 보면 공부 ‘工’ 자 형을 하고 있음을 안다. 세 칸으로 된 건물 가운데 대청은 앞뒤 벽이 없이 시원스레 뚫려 있어 전후면의 경관이 바로 눈앞에 다가선다. 공부를 하는 건물에 한 칸을 비워둔 곳, 그 빈 칸 즉 ‘사이(間)’는 무슨 의미일까. 오래 전부터 나에겐 그게 화두다.

이 빈 칸은 宋純의 시조 “十年을 經營하여 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間 달 한間에 淸風 한間 맡겨두고/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는 이른바 초려삼간의 철학과도 통한다.
초려삼간은 ‘나(인간)’만이 쓰는 것이 아니고 ‘달(月)’과 ‘淸風’ 셋이 각각 나누어 쓰는 공간이다. 여기에 江山은 있는 그대로 초려삼간의 병풍이 된다.

이 무릎을 탁 칠만한 ‘사이-틈새의 風流’를 만난다. 金長生은 “十年을 經營하야 草廬 한間 지어내니/半間은 淸風이오 半間은 明月이라/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라고 읊었다.

三間은 半間으로 더 축약이 되고 있지만, 기막힌 ‘사이의 경영’이다. 있는 그대로의 텅 빈 공간에서 만물이 공생하는 희망과 행복의 설계도이다. 眞空妙有라는 말처럼 텅 빈 곳에서 만 가지의 묘미가 생겨나는 이 ‘사이’의 鳥瞰圖에 시선이 고정된다. 텅 빈 공간의 ‘강의 없는 강의’는 마치 전위예술가의 어록같다.

 또 한 가지, 안동지방이나 동해안 산간지방 등에 까치구멍집이란 것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흙바닥인 봉당이 있고, 그 좌측에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우측에는 정지(부엌)간이 있어 가축과 주인이 하나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여기에는 또 대청 상부 지붕마루 양 끝에 까치구멍이 나 있다. 그래서 집 내부에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고 관솔을 피울 때 발생하는 연기가 외부로 배출된다. 그 뿐인가. 낮에는 이리로 빛을 받아들여 어두운 집안을
밝힌다.

이렇듯 까치구멍집은 만물이 텅 빈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지혜의 원형이 아닌가. 바로 통합, 통섭의 인자는 서로를 텅 비운 ‘사이(間)’라는 빈틈의 場이다. 노자가 말하는 ‘비어있어서 바퀴가 굴러가는 바퀴통(輻)’이거나, 장자가 말하는 ‘도의 지도리(道樞)에서 무궁한 변화를 얻는 환중(環中)’과 같은 것 말이다.

학구재의 빈 대청마루, 까치구멍집의 공간, 십년의 경영으로 얻은 선조들의 草廬三間. 이 모두 다양한 전공자들이 만나 기탄없이 서로의 색깔 있는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하나의 좋은 힌트이다. 통합·통섭을 이뤄내는 길은 이처럼 자기를 비운 ‘사이’의 경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