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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절망, 절망의 철학
철학의 절망, 절망의 철학
  • 김영민·철학자
  • 승인 2007.03.19 10:23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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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란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추어지는 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아도르노)

인식-중심주의는 이론가들의 단골 표적이 되어왔다. 인식이 지성(Intelligenz)의 하수인 노릇에 그친다거나, 이데올로기나 아비투스의 볼모라거나, 혹은 그 팔다리가 아무 쓸데없이 짧다는 식의 비판에 학인들은 익숙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인식-'중심주의'는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아도 정작 우리 삶을 키우는 '인식'은 희귀하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종교 사회가 인식-중심주의와 불화하는 방식은 유별나기도 하다. 그들은 학인들의 인식이 낮은, 심지어 타락한 수준의 알음알이이며, 구원과 동떨어진 지식은 결국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너무 강하게) '확신'한다. 거꾸로 학인들은 종교계를 향해서 여전히 서구의 18세기식 초기 계몽주의 담론을 지겹게 되풀이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학문적 인식 일반, 특히 인문학적 지식의 풍경은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이다. 본격 인문학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졸아들거나 자기 그림자 속으로 퇴각하는 나르시시즘의 형국을 보이는 반면, <···하는 법, 몇 가지> 따위의 의사-인문학적 키치들은 운좋으면 곧장 대박이다. 대학의 게시판은 취업 정보와 기술의 광고로 도배된 지 오래지만, 시집의 출판 비율은 세계 최고다. 어떻든 종이책과 대면적 대화관계로 교직되던 전래의 인문주의적 실존은 그저 퇴영적이거나 비효율적인 잉여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세종도 퇴계도 다산도 ceo로 둔갑하고, 한때 ceo였던 자가 이제는 대통령 후보 1순위다.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친구였다가 비참하게 죽었던 예수라는 젊은이도 어느새 ceo로 둔갑해서 잘도 팔린다.

모든 지식은 기업을 향해서 몰려들고, 기업을 통해서 재확산된다. '기업모형에 따라서 사회의 모든 영역이 재조직'(김동춘)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증여와 공유의 영역이었던 종교와 학교와 가정도 그 기업모형의 기능적 효율성을 배우고 쫓아가느라 열심이다. 이 참에, 철학자들은 19세기 개화판의 양반계급처럼 쫓아갈 체면도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렇다고 머물러 있자니 코앞에 닥친 궁상이 더욱 애련하다. 그람시에 의하면, 일반 대중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철학은 역사적이며 또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 삶이 되지만, 이제 세속의 대중들과의 철학적 불화는 바야흐로 치명적이다.

아도르노가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에게 부여한 임무,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메시아적 관점'이라고 스치듯이 부른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어떤 자의(恣意)나 폭력도 없이 오직 대상과의 교감으로부터 나오는 관점", 그리고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려 그 왜곡되고 낯설어진 모습을 들추어내는 관점"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내던져진 자들에게 선사된 관점일 수 밖에 없다.

세속의 체계적 덫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관점은 없다. 그런 뜻에서라면, (레비나스의 지론이 아니라도) 인식을 통한 구원도 또 그같은 메시아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2007년, 한국에서 철학이 생존하는 법을 일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이같은 비관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아도르노에게 그 구원의 관점은 '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불가능성을 파악하는 일'로 귀결된다.

통속적으로 고쳐 말하면, '죽어야 산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이나 시인 허만하의 표현을 차용하면, 철학 역시 워낙 제 자신의 글과 말의 힘만으로 직립(直立)하는 삶의 양식이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의 철학과 인문학은, 소수의 이반자가 갈데없이 퇴각하는 사이, 자본과 관료에 기생하면서 연명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타협하거나 도피함으로써 연명했다면 그는 작은 종말이었을 뿐 새로운 시작의 신호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럼없이 죽는 것, '사회적 관계를 갖지 않는 희생양'(르네 지라르)이 되는 것, 그리고 그 무능의 급진성 속에서 오롯이 걸어가는 것! 철학의 절망 앞에서 절망의 철학에게 주어진 희망은 바로 그것이다: '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불가능성을 파악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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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sabin 2007-05-05 01:43:45
거시적으로 볼때로 수정드립니다.

shinsabin 2007-05-05 01:40:44
아도르노의 좋은 관점의 지적이라 생각됩니다. 오랫만에 숨통이 좀 트이는듯한 순간을 만났습니다. 자기 논리에 꽉차 허우적 거리는 세상, 그리고 그 논리의 승리를 서양의 한편에서는 공공연히 자축하는 모습들. 그 안에서 존재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구원 그런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혹은 그에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그럴 시간들이나 있을까 하는 착찹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절망에 대해 어느정도 연구한 바에 의하면, 절망 자체는 신 앞에서의 죄이지만 인간의 그런 죄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필요하게 하고, 그 한계에서 오는 절망의 인식 자체가, 불가능을 아는 하나의 가능이라 생각합니다. 즉, 철학의 논리 분석적인 이성지상주의에 대응한 존재 신학적 관점의 대안이지요. 절망의 상태조차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회피하는 것 보다는 가시적으로 볼때에 존재의 차원에서는 상위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아도르노의 형이상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모든 사물을 구원의 관점에서 서술하라는 짦은 코멘타는, 간만에 빛을 본듯해 반가웠습니다.

밝음 2007-04-10 17:38:30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예전의 문화비평의 또 다른 버전이군요. 문제제기는 충분히 되었으므로 이제 보다 구체적인 형상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지나가다 2007-03-29 21:27:52
무슨 말인가? 이 글을 읽으며 나는 현란한 말의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답답해하고 있다.

아래미 2007-03-23 12:43:35
인문학, 아니 철학은 그래서 뭐 하자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멋은 있으나 구체성이 없는 글 - 그게 인문학이 절망으로 빠져가는 모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