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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자연의 인과응보
[문화비평] 자연의 인과응보
  • 배병삼 성심외대
  • 승인 2001.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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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0 00:00:00

배병삼 성심외대·정치학

30년 전 우리네 꿈의 상징은, 청계천 위로 새로 난 고가도로와 그 곁에 검게 우뚝 솟은 삼일빌딩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의 속표지에 선명했던 이 두 건축물의 사진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내일의 모습으로, 아니 우리의 성장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마치 미국의 상징이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라면, 우리도 그것의 30% 정도는 따라잡았다는 표지가 31층 삼일빌딩의 검은색 ‘막대그래프’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설렘 속에는 직선에의 조급한 열망이 가득 담겨져 있던 것인데, 남산에 방송탑을 세우면서 실제 탑크기에다 산높이를 합산해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탑이라고 우기던 해프닝도 그런 열망의 과도한 표출일 따름이었다(그 당시 누군가가 말했었다. “도시는 선이다”라고).

그 즈음 방방곡곡을 파고든 ‘새마을운동’의 원동력도 ‘직선에의 열망’에 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반듯하게 펴고, 비뚤비뚤한 돌담을 허물고, 초가지붕을 헐어 네모반듯한 슬레이트로 새로 이는 그 ‘직선에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던 지는, 오늘날 두메산골에서조차 초가집 찾기가 어려운 점을 두고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허나 30년이 흐른 지금, 그 새마을은 애울음 끊긴 황폐한 곳이 되고 말았으니 ‘새’ 마을은커녕, 있던 ‘마을’마저 망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에 아로새겨진 새로움에의 열망은 아직도 ‘새만금’ 방조제로 남아있다. ‘百金’도 아니고 ‘千金’도 아니고 ‘萬金’의 꿈을 울퉁불퉁한 해안선을 직선의 방조제로 막아 ‘새롭게 만들겠노라’는 저 ‘새-만금’의 계획에서, 꼭 ‘헌’마을을 바로 펴서 ‘새’마을로 만들겠노라던, 직선에의 꿈과 그 몰락이 연상됨을 어찌 망발로 치부할 수 있으랴.

급기야 올해는 쌀값이 추락하리라는 우울한 전망과 함께, 또 30년만에 대도시 근교의 그린벨트를 푼다는 소식이 겹쳐든다. 그린벨트에는 농경의 흔적이 남아있고, ‘웃말’ ‘아랫말’ ‘정골’ 따위의 옛 지명들이 남아있고, 또 친정나들이 왔다 떠나는 딸네의 눈물바람과 고갯마루 넘어갈 때까지 ‘어여 가라’며 손사래치던 어미의 애달픈 정경도 남아있다. 이제 대도시 주변의 푸른 숲이 사라지면, 그 곳에 깃들인 땅이름과 이야기, 그리고 역사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잿빛의 근대와 직선의 열망만이 더께를 더할 터다.

실은 힘세고 믿을 만한 것을 비유할 때 ‘태산같다’는 표현을 쓰지만, 요즘은 산조차 얼마나 무기력한지 모른다. ‘윙-’ 소리나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껍질 벗기듯 툭툭 잘라내고, 그 다음 굴삭기로 땅을 몇 번 폭폭 퍼내면, 곧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만다. 그 뒤는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벗겨진 숲은 ‘雜木‘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을 단 채, 울음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휘청휘청 트럭에 실려 팔려간다. 울음소리를 죽인 (아니 소리를 빼앗긴) 그 벗겨낸 땅위에 우리는 회색빛 아파트를 짓고 30년간 추구해왔던 직선에의 꿈을 다시금 재현하는 것이다(이젠 지칠 때도 됐건만).

허나 ‘天地不仁’이라, “자연은 성긴 그물 같으나, 실은 그보다 더 촘촘할 수 없다”고 했다(天網恢恢, 疏而不失.‘도덕경’). 자연이 인과응보라는 부릅뜬 눈을 가진 존재임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땅과 숲을 가뭇없이 죽여버리는 우리 욕망의 찌꺼기는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올 여름의 그 ‘녹조’와 ‘적조’로 둥둥 떠서 “아야, 아야”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울음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한 숲의 哀聲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아파요, 아파요” 소리를 푸르게도 또 붉게도 내는 것이다. 땅에서 사라진 ‘그린벨트’가 강으로 흘러들어 다시금 ‘그린벨트’(녹조 띠)를 드리우고, 또 바다에 이르러선 ‘레드벨트’(적조 띠)가 되어 ‘블루벨트’(청정해역)의 허리를 죄는 셈이다. 아! 무섭지 않은가. 이 자연의 촘촘한 인과응보의 그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얼마나 자애로운가. 제 몸의 흙을 자아내어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자연의 모습이라니! 적조현상을 몰아내는 유일한 처방이 ‘황토흙’이라니 말이다. 옛 글투를 흉내내자면, 오늘 처한 우리 문명은 숲의 푸르름을 ‘적조’의 붉음이 이기고, 그것을 또 황토라는 노란색이 이기는 격이다. 문자를 쓰자면, ‘赤克靑, 黃克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실험실의 닫힌 수조에서 맹위를 떨치는 황토흙도 강과 바다에서는 노력만큼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교훈을 얻는다. 자연은 본시 조화로우나, 붉은 인간의 욕망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많은 황토흙으로도 재앙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허면 지난여름 우리 사회를 지독하게 달구었던 적조(진보)와 녹조(보수)의 대립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황토흙은 과연 무엇일까. 아니라면 물이 차가워지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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