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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주의에 빠진 진보 정치…그들은 왜 믿음을 잃었나
세속주의에 빠진 진보 정치…그들은 왜 믿음을 잃었나
  • 김재호
  • 승인 2024.03.1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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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영성 없는 진보』(온뜰 | 140쪽) 쓴 김상봉 전남대 교수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은 오직 세계의 고통이 
자기 자신의 고통이 되는 한에서 증명된다. 
세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사람은 자기 신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듯이 세계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진보 정치가 세속주의로 흐르면서, 그 믿음을 잃어버렸다.” 최근 출간된 『영성 없는 진보』에서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사진)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이같이 고백했다. 김 교수는 “믿음은 영성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영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뜻한다. 

진보 정치의 역사는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진보는 타자의 비판과 부정에만 머물러 적극적 자기형성, 즉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실패했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국가인 공화국의 요체, 즉 경제의 공공성 확립으로 나타나야 한다. 김 교수는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했다 실패한 후 그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고 사회비판적 학술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11일, 김 교수를 인터뷰했다. 

과연 영성이라는 게 뭘까. 정치와 종교는 다른 영역일 텐데, 비종교인도 영성을 가질 수 있을까. “영성은 다른 무엇보다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난다.” 김 교수는 “동학 이래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영성으로 가득 차 있다”라며 “예를 들어 동학농민군의 4대명의(4개 항의 행동강령)나 안중근이 포로를 석방한 이야기나, 3.1운동의 폭력 없는 저항은 모두 그런 영성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수운 최제우부터 전태일까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역사를 일궈냈다. 다만, 한국의 역사는 “밀실에 칩거해서 수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추상적인 종교적 영성이 아니고, 현실의 불의에 맞서서 때로는 무기를 들고 싸우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영성”이라는 설명이다.

김상봉전남대교수(철학과)는연 세대 철학과에서 학·석사를 했다. 독일 마인츠대에서 철학, 고전문 헌학, 신학을 공부하고 이마누엘 칸트의『유작』(Opuspostumum) 에 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에서 가르치다가 해직 됐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 아카데미 교장과 학벌없는사회 이 사장을역임했다. 『호모에티쿠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서로 주체성의 이념』, 『네가 나라다』 등 을집필했다. 사진=온뜰

 

다시 전태일을 생각한다…“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다”

이 책은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에도 적잖은 파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자기비판을 담았다고 적었지만, 그동안 한국 정치가 놓치고 있었던 본질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의 실천, 실천의 철학 차원에서 비판적 학술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어서다. 요즘 학계에서는 비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의 없다시피 한다. 책의 뒷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 진단, 통렬한 비판, 그리고 희망의 가능성”

『영성 없는 진보』에서 김 교수는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종합인간학부)의 『조선사상사』(도서출판 길 | 2022)를 인용하며 ‘조선적 영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나와 전체의 합일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영성은 신라의 고승 원효의 ‘일심’에서부터 퇴계 이황의 ‘천인합일’이나 수운 최제우의 오심즉여심(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온 한국 사상 전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을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에서 찾았다. “자기형성이란 타자부정의 반대말이다. 그러니까 자기형성은 일단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다. 그것은 전체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그는 “믿음은 그런 이성적 자기형성 또는 전체 형성의 전제라고 말할 수 있다”라며 “왜냐하면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는 믿음 또는 이 세계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이 있는 경우에만, 세계의 형성이 나 자신의 자기 형성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의 3장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 사이에서’는 비판이 아닌 형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보편적 의료 보험 제도 △영국의 기간산업 국유화 모델 △독일의 노사 공동 결정 제도 △기본 소득 등이 그러한 사례로 제시된다. 

 

당파적 권력 획득에 매몰된 사회

김 교수의 문제 의식은 비단 진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영성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파행은 우리의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 당파적 권력 획득에만 매몰돼 있다. 정치인이나 시민 너나 할 것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례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것일까. 『영성 없는 진보』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전태일 열사(1948~1970), 서준식 인권운동가(1948~ )이다. “전태일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 사람이었다.”, “전태일에게서 그 믿음은 더도 덜도 아니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신앙이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한 투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지난날 안중근이나 백범 김구 같은 위대한 정신이 보여 준 영성을 우리 시대에 가장 탁월한 전범으로 보여 준 이가 바로 서준식이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면서도 예수의 삶에서 구원의 말씀과 고귀한 윤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예수가 그 어렵고 위험한 길을 끝까지 걸음으로써,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속적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머리말을 대신해 쓴 ‘참된 믿음을 기다리며’에서 이도종 목사(1892~1948), 손양원 목사(1902~1950)도 언급했다. “오래전 해방 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이 폭력적으로 충돌하던 시절, 좌익 무장대의 손에 죽임당한 제주의 이도종 목사나,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안재선을 양자로 받아들인 순천의 손양원 목사 같은 분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참된 믿음과 영성의 모범이 된 분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김 교수는 “현실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급급하게 된다”라며 “과거 치열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부터 한국의 시민사회나 정치권에서는 역사의식이 다소 결핍돼 있었다고 언제나 생각해왔다”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한국인의 우려스러운 정신적 결핍”이다.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찾기 힘들고 말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그저 오늘 내일의 문제에만 골몰한다. 오늘 내일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늘과 내일의 일을 언제나 영원의 관점에서 동시에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로부터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인물 그림=전태일재단

 

종말 아닌 진보적 영성 회복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은 뼈아프다.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부정과 비판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 혹은 죽음으로라도 그 빚을 감당하려고 했던 실천도 있었던 건 아닐까. “당연히 그런 영성이 살아 있던 시대가 있었다. 내가 비판한 것은 그런 시대가 이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책에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1980년 5월(광주 민주화운동)을 전환점으로 진보적 시대정신이 부정과 비판에 매몰되었는지도 설명했다.” 김 교수는 “물론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이 책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본래의 진보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체에 대한 믿음은 오용될 수도 있다. 사랑(?)에 토대를 둔, 그러한 믿음은 파시즘이나 극단적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 개인의 전체에 대한 믿음과 사회의 전체에 대한 믿음은 다른 것일까. 더욱이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파시즘적 열광과 참된 영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전체를 빙자해 자신의 영광과 권력을 추구할 뿐이지만, 참된 영성은 오직 타인의 고통에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응답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은 오직 세계의 고통이 자기 자신의 고통이 되는 한에서 증명된다”라며 “세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사람은 자기 신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듯이 세계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현실은 지옥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김 교수는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집단적 자살을 향해 치닫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은 각자도생 즉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사회 붕괴의 반영”이라면서 “우리가 공멸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내가 전체와 하나라는 깨달음과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는 외부의 적에 대항해 단결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고, 거꾸로 내부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상호간의 적대적 전쟁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부 구성원 간 적대적 전쟁과 각자도생

또한 『영성 없는 진보』에서 눈에 띈 부분은 ‘교육의 실패와 정신의 빈곤’을 지적한 내용이다. “무지와 무사유”가 판을 치고, 특히 “세계에 전체에 대한 일관된 관점을 내면화”하기 어려운 교육 체계를 비판한 것이다. “학생들이 문제집이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김 교수는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경쟁지상주의 교육, 오로지 입시를 위한 교육이 문제”라며 “논어의 첫머리도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첫 문장도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지닌 본성적 탐구열이 시험교육에 의해 억압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영성 없는 진보』는 한국 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큰 울림을 주는 듯합니다. “타자의 비판이 한갓 타자의 부정에 머물러 적극적 자기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34쪽) 여기서 ‘자기 형성’은 영성, 즉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을 만들어가는 것인가요? 만약 믿음이 종교적인 것이라면, 하루 하루 일에 치여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비종교인들도 그러한 믿음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요? 왜냐하면 “영성이란 특정한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소질이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11쪽)이지만, 또한 동시에 “영성은 종교적 삶의 지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15쪽)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자기형성이란 타자부정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형성은 일단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전체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성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그런 이성적 자기형성 또는 전체 형성의 전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는 믿음 또는 이 세계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이 있는 경우에만, 세계의 형성이 나 자신의 자기 형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책은 마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현재나 가까운 미래보다는(현재나 가까운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반성’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즉 진보 정치의 위기는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여기서 역사는 시대적 역사뿐만 아니라 자기 동일성 차원에서 개인사까지도 포함될 듯합니다.

현실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급급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에 대한 대처가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식이 중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과거 치열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부터 한국의 시민사회나 정치권에서는 역사의식이 다소 결핍되어 있었다고 저는 언제나 생각해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이것이 한국인의 우려스러운 정신적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찾기 힘들고 말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그저 오늘 내일의 문제에만 골몰합니다. 오늘 내일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늘과 내일의 일을 언제나 영원의 관점에서 동시에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 ‘교육의 실패와 정신의 빈곤’ 중에서 “무지와 무사유”가 판을 치고, 특히 “세계에 전체에 대한 일관된 관점을 내면화”하기 어려운 교육 체계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점을 극복하는 교육의 사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정말 그러한 이상적인 교육이 있을까요?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경쟁지상주의 교육, 오로지 입시를 위한 교육이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지금의 학교교육은 저의 학창시절보다 더 퇴보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논어의 첫머리도 學而時習之不亦說乎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첫문장도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본성적인 탐구열을 시험교육이 억압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문제집이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 “한국 민주주의의 참된 위기는 자기 자신이 세계 전체와 하나라는 영성(靈性)이 이 나라의 진보 진영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데 기인한다.”(67쪽)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이 뼈아픕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부정과 비판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혹은 죽음으로라도 그 빚을 감당하려고 했던 실천도 있었던 건 아닐까요?

당연히 그런 영성이 살아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한 것은 그런 시대가 이제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저는 어떤 의미에서 80년 5월을 전환점으로 진보적 시대정신이 부정과 비판에 매몰되었는지도 설명했습니다. 물론 저는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책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본래적인 진보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그런 간절한 소망의 마음을 담아 쓴 책입니다. 

□ 이 책에서 말하는 혁명적 영성은 다음 구절에 기반하고 있다고 읽힙니다.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72쪽)(히브리서 11장 1절). 그런데 과학적 이성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믿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천의 측면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 혹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태복음 5장 46절) 등을 따르는 건 어찌보면 역설일 수 있고, 성인이나 열사가 아니고서야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성은 다른 무엇보다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납니다. 동학 이래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영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책에서도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했지만, 예를 들어 동학농민군의 4대명의나 안중근이 포로를 석방한 이야기나, 3.1운동의 폭력 없는 저항은 모두 그런 영성의 표현입니다.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이 점에서 수운에서 전태일까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역사입니다. 그것은 밀실에 칩거해서 수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추상적인 종교적 영성이 아니고, 현실의 불의에 맞서서 때로는 무기를 들고 싸우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영성이므로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묻혀 있을 뿐입니다. 

□ “차이를 적대적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건설적 협동이 되게 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진보 운동 속에서도 보수화된 신앙 속에서도 우리는 이제 더는 전체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106쪽) 하지만 사랑(?)에 토대를 둔, 전체에 대한 믿음은 파시즘이나 극단적 포퓰리즘 등 오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립니다. 개인의 전체에 대한 믿음과 사회의 전체에 대한 믿음은 다른 것인지,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나와 전체를 하나로 만드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전체를 지배함으로써 나와 전체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파시즘적 영성입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통속적인 기독교에서 흔히 보는 사이비 영성입니다. 이것은 자기와 신을 동일시하면서 신의 영광을 빙자하여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의 길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데 있습니다.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은 오직 세계의 고통이 자기 자신의 고통이 되는 한에서 증명됩니다. 세계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사람은 자기 신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듯이 세계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파시즘적 열광과 참된 영성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전체를 빙자하여 자신의 영광과 권력을 추구할 뿐이지만, 참된 영성은 오직 타인의 고통에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응답하는 데 존립하는 것입니다. 

진보적 운동은 종종 예링의 책 이름처럼 ‘자기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귀착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면적인, 권리를 위한 투쟁은 반드시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게 됩니다. 같은 편은 연대하고 사랑하지만, 다른 편은 미워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받는 사람이 응답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은 각자도생 즉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것은 사회 붕괴의 반영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입니다. 사회가 붕괴되고 나면 누구도 혼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사회(societas/society)란 원래 소치우스socius들의 결사체입니다. 아미쿠스amicus가 이해관계 없는 친구라면, 소치우스socius는 어떤 공동의 목적을 위해 결속한 동료, 특히 전쟁에서의 동맹자를 가리킵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전쟁으로 날밤을 새던 고대 사회의 잔재이기는 하지만, 사회공동체란 최소한 외부의 적에 대항해 결속한 동료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외부의 적에 대항해 단결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고, 거꾸로 내부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상호간의 적대적 전쟁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멸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내가 전체와 하나라는 깨달음과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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