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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에 맞서는 비판적 ‘언어감수성’
권위주의에 맞서는 비판적 ‘언어감수성’
  • 김재호
  • 승인 2024.03.05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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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버티는 힘, 언어의 힘』(필로소픽 | 240쪽) 쓴 신동일 중앙대 교수

젊은 학생들은 다양한 필요와 
자기주도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제도권에서 커리어를 
긴 세월 동안 구축한 교수들은 
구시대의 유업을 붙들지 않을 수 없다.

방황하는 ‘대학생·직장인’을 위한 지침서가 출간됐다. 바로 신동일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과)가 쓴 『버티는 힘, 언어의 힘』이다. 이 책은 개성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에 맞서 비판적 언어감수성을 기르자고 주장한다. 차별과 배제, 억압과 강요가 난무하는 일상에 맞서는 힘으로서 언어와 기호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느낄 수 있으려면, “회복과 변화를 위한 연장통으로 자기만의 언어기술과 언어감수성을 연마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신 교수를 인터뷰했다. 

“대학은 여전히 집단성·동질성·영토성 등을 핵심 가치로 붙들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대학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미래에 예견된 급격한 변화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대학은 여전히 복지부동이다. 신 교수는 “학제적이고 탐험적인 지성이 활기차게 일해 볼 공간이 의외로 없다”라며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기득 권력이 긴장하게 되고 개방과 횡단이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경계와 위계가 더욱 굵은 선으로 그어지는 느낌도 받는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신 교수는 다음을 당부했다. “일단 실험적으로나마 학제적인 연구를 감당할 수 있는 학자들의 소모임, 학과, 단과대학이라도 개설되고 전폭적으로 지원되면 좋겠다. 무슨 시도를 하든 느긋하게 지켜보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동일중앙대교수(영어영문학과)는 중앙대를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와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 캠퍼 스)에서 응용언어학으로각각석·박사를했다.『미학적삶 을위한언어감수성수업』,『담론의이해』,『앵무새살리기』 등을집필했다. 사진=신동일

 

꼰대가 된 교수…그는 왜 청년들을 안 만나나

생각해 보면,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일이 말로 인해 발생한다. 사랑의 말은 결속을 강화하지만, 비난의 폭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특히 언어는 권력구도를 지향한다. “언어는 다양성과 자유를 빼앗고 사랑을 왜곡하며 지배적인 권력에 순복시킬 수 있는 핵심 장치다.” 신동일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과·사진)의 『버티는 힘, 언어의 힘』은 부조리한 권력문화를 근근이 버티고 있는 그대에게 자유와 사랑을 되찾으라고 조언한다.

신 교수는 서로 다른 개별적인 삶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항대립의 사회구조를 자주 목격했다. 코로나19 펜데믹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온전한 자유를 찾고 서로를 배려하는 삶을 선택하려면 세상을 포획한 언어와 기호를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게 됐다.  

그런데 비판적 언어감수성을 키우려면, 단어 외우기나 텍스트 이해하기 등 정말 기본적인 언어학습이 선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신 교수는 “기본적인 언어학습이 선행돼야 한다고 선뜻 단정하기 힘들다”라고 답했다. “기본과 선행의 언어정보를 충분히 소유하더라도 언어를 사용하는 정체성이나 관계성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즉, 언어를 삶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권력관계를 조정하거나 사회화 과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년 넘게 차례대로 학습된 언어는 그저 저장된 지식이며 의미덩어리로 남곤 한다.” 

이 때문에 신 교수는 “기본과 선행만 요구되는 언어-중심주의를 탈피해야 한다”라며 “언어·형태 학습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다감각적 기호, 공간적이고 관계적인 자원을 상보적으로 활용하는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언어가 정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

그렇다면 언어 이외의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오히려 언어가 정말 답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신 교수는 “시장의 질서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걸 ‘극복하는’ 주체성이 드러나는 방식 역시 시장의 지배적인 의미체계가 감안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권력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계의 질서이며 우리의 자의식은 지배적으로 유통되는 의미구조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그러나 언어와 기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작용은 우리를 둘러싼 실체를 본질로만 고정시키지만 않는다.

아울러, 언어와 기호의 실천을 다양한 속성과 유형으로 다뤄야 한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에는 삭발을 하고, 침묵을 지키고, 체형을 바꾸고, 춤을 추고, 달리기를 하는 등 여러 기호성이 예시로 언급됐다. “사회기호학자들은 복합양식으로 다양한 종류의 기호가 선택되거나 조합될 때도 일련의 규칙성 있는 코드가 발견된다고 본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어른이 되려면
차별과 위계의 언어에 더욱 민감하기를

신 교수는 예전에 대학(원)생과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얘기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그런다. “내 방식, 내 경험, 내 기억이 그들에게 동일한 기능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 교수는 “그들을 강의실 밖에서 만나 거창한 무용담이나 대단한 비법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그들은 좀처럼 고작 한두 학기 가르치는 교수에게 자신들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삶의 단면을 드러내지 않아요”라고 책에 적었다. 나중에야 자신이 꼰대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MZ세대와 소통하는 법…그대로 바라보기

그래서 신 교수는 청년에게 너무 들이대지 말고 지켜보자고 한다. 친절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친절하자는 것이다. 신 교수는 “젊은 학생들은 다양한 필요와 자기주도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제도권에서 커리어를 긴 세월 동안 구축한 교수들은 구시대의 유업을 붙들지 않을 수 없다”라며 “자신들이 학습하고 감수한 품행을 젊은 세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한다면 불통과 충돌이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표현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랭스코퍼’다. 작은 사물을 보는 마이크로스코퍼(현미경)나 먼 대상을 보는 텔레스코퍼(망원경)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통해 세상을 지켜보는 렌즈가 바로 랭스코퍼다. 둘째, 생태주의 언어학이다. 언어학에 생태적 측면이 있다니 놀랐다. “생태주의 언어학은 합리주의 원리로는 포착하기 힘든 서로 다른 언어들의 공존, 혹은 기호적 환경의 유익에 관심을 둔다. 표준어든 방언이든, 모어든 외국어든, 남성의 언어든 여성의 언어든, 혹은 표정이나 동작으로 전달되는 기호들과 언어 규범을 애써 이항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권위주의, 반지성주의에 맞서는 비판적 언어감수성이 필요하다. 이미지=픽사베이

 

언어로 세상을 지켜보는 렌즈 ‘랭스코퍼’

특히 신 교수는 “민족주의나 관료주의 발상으로 특정 언어의 사용과 학습을 강압적으로 요구하거나 배제한다면 그걸 언어제국주의나 언어차별주의 문화로 경계한다”라며 “주류 언어든 소수언어든, 크고 작은 언어의 사용집단이 관계를 맺고 공존할 수 있는 상호작용에 더 비중을 둔다”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생태주의 언어학은 각자의 언어정체성이나 언어권리를 함께 존중하기 위해서 비위협적인 언어사용 환경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앞으로 신 교수는 차별적 경험이나 부적절한 관행이 언어능력과 언어사용의 의미체계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전념할 계획이다. “예를 들면, 큰 시험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질서, 상용어나 공용어 정책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구조 등을 좀 더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이번에 출간하신 『버티는 힘, 언어의 힘』을 하루만에 모두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게 잘 읽혔는데요. 마치 새내기 대학생이나 직장인을 위한 ‘생활과 언어 지침서’로 읽혔습니다. 어떤 기획 의도로 집필하셨나요?  

언어와 기호에 관한 인문적 지식, 혹은 비판적 감수성을 학습한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 찾아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펜데믹 시대를 목격하면서 책을 서둘러 출간하고 싶었습니다. 그땐 서로 다른 개별적인 삶을 통제하는 권위주의,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항대립의 사회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 때였습니다. 온전한 자유를 찾고 서로를 배려하는 삶을 선택하려면 세상을 포획한 언어와 기호를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본문에서도 여러 차례 부연했지만 다양성과 자유를 빼앗고 사랑을 왜곡하며 지배적인 권력에 순복시킬 수 있는 핵심 장치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 “언어와 기호를 선택하고 배치하는 기술은 권위주의 질서에서 버틸 수 있는 자기배려의 자원입니다. 이전과 다르게 사용하는 언어와 기호는 자신과 타자를 배려하고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원입니다.”라고 적으셨습니다. 이를 위한 다양한 언어적 행위가 제시되었는데요. 그런데 기술과 자원으로서 언어와 기호를 익히기 위해선 정말 기본적인 언어학습(단어 외우기, 텍스트 이해하기 등)이 선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언어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선뜻 단정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어떤 구조적인 시스템 안에서 입력-저장-출력의 과정으로 언어정보가 처리된다고 봅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대개 기본적인 언어정보부터 난이도 순서대로 획득하는 과정으로 인식됩니다. 

그렇지만 기본과 선행의 언어정보를 충분히 소유하더라도 언어를 사용하는 정체성이나 관계성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즉, 언어를 자신의 삶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권력관계를 조정하거나 사회화 과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년 넘게 차례대로 학습된 언어는 그저 저장된 지식이며 의미덩어리로 남곤 합니다. 

기본부터 시작하는 선행학습이 언어를 지나치게 분리시킬 수 있고 잘게 쪼개진 언어지식은 실제적 환경에서 누군가 사회화되는 과정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파닉스부터 시작해서 어휘나 구문 학습까지 기본과 선행 학습에 충실했지만 언어가 자원이 되지 못하고 결핍감이나 문제적 자아만 커진다면 자기배려의 언어기술, 언어를 통한 건강한 자아정체성의 학습은 진행될 수 없습니다. 언어/형태 학습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다감각적 기호, 공간적이고 관계적인 자원을 상보적으로 활용하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라면 (기본과 선행이 요구되는) 언어-중심주의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 “우리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현장은 욕망이 가득한 시장이고, 이익이 좀처럼 공유될 수 없는 권력의 담론장입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한 언어의 권력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 새로운 혹은 좀 더 예민한 언어뿐일까요? 그 외에 방법은 없을까요?

시장의 질서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걸 ‘극복하는’ 주체성이 드러나는 방식 역시 시장의 지배적인 의미체계가 감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중에도 언어와 기호를 다르게 배치하고 선택하면서 삶의 지경을 바꾸고 사회질서의 변화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권력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계의 질서이며 우리의 자의식은 지배적으로 유통되는 의미구조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그러나 언어와 기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작용은 우리를 둘러싼 실체를 본질로만 고정시키지만 않거든요.

대중주의와 시장주의 사회에 언어와 기호를 새롭게 배치하고 선택하는 것만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전략적인 실천입니다. 다만 언어와 기호의 실천을 다양한 속성과 유형으로 다루면 좋겠습니다. 제 책에서는 삭발을 하고, 침묵을 지키고, 체형을 바꾸고, 춤을 추고, 달리기를 하는 여러 기호성을 예시로 언급되었습니다. 사회기호학자들은 복합양식(multimode)으로 다양한 종류의 기호가 선택되거나 상보적으로 조합될 때도 일련의 규칙성이 있는 코드가 발견된다고 봅니다.

□ MZ 세대와의 의사소통 방식을 서술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너무 들이대지 말고, 지켜보고, “친절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친절하기” 등은 대학 교육 현장에서 매우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련한 일화가 있으시다면,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젊은 학생들은 다양한 필요와 자기주도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제도권에서 커리어를 긴 세월 동안 구축한 교수들은 구시대의 유업을 붙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자신들이 학습하고 감수한 품행을 요구하는 중에 불통과 충돌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일화보단 최근에 전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이강인 선수 사건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손흥민식 인내의 리더십과 이강인식 자유로운 품행이 충돌한 것이죠. 대중주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유명 축구선수인 이강인 선수는 “절대로 해서 안될 행동”을 사과했고 손흥민 선수는 “강인이가 진심으로 반성했다”며 용서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장 다니는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비슷한 상황을 상정하고서 거기 있는 윗사람의 위치성으로 아랫사람의 품행이 쉽게 교정될 수 있을까요? 차이와 다양성, 경계 짓기, 타자성, 위협과 폭력에 관한 감수성 교육, 배려하고 회복시키는 언어교육이 어느 때보다 시급합니다.

□ ‘생태주의 언어학’은 생소한 개념입니다. 구체적인 예와 함께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생태학은 개체 간의 상호작용성, 유기체적 역동성에 관심을 둡니다. 생태주의 언어학은 합리주의 원리로는 포착하기 힘든 서로 다른 언어들의 공존, 혹은 기호적 환경의 유익에 관심을 둡니다. 표준어든 방언이든, 모어든 외국어든, 남성의 언어든 여성의 언어든, 혹은 표정이나 동작으로 전달되는 기호들과 언어 규범을 애써 이항으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나 관료주의 발상으로 특정 언어의 사용과 학습을 강압적으로 요구하거나 배제한다면 그걸 언어제국주의나 언어차별주의 문화로 경계합니다. 주류 언어든 소수언어든, 크고 작은 언어의 사용집단이 관계를 맺고 공존할 수 있는 상호작용에 더 비중을 둡니다. 그리고 각자의 언어정체성이나 언어권리를 함께 존중하기 위해서 비위협적인 언어사용 환경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 ‘전임교수는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라’는 충고는 토론이 부족한 국내 대학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또한 학문 간 경계를 허무는 연구가 부족한 상황도 책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막 전문가이자 횡단의 학자 테오도르 모노나 세계적인 학자인 니컬러스 로즈 같은 인물이 한국사회에서 나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는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로 점철된 기득권력 때문으로 읽히는데요. 한 번 찍히면 좁은 전공 분야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책에서는 비유와 상징으로서 언어가 강조되는데요. 정말 이러한 언어로 극복 가능할까요?

전임교수가 되어서야 입을 열라고 제가 충고한 것이 아니고 입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여전히 대학의 관행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권위주의나 반지성주의 통치질서가 아직도 우리 (대학)사회를 포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학자들이 소신껏 학술활동하기가 쉽지 않죠. 제가 속한 학계에서도 기득권력의 지식체계를 문제화하는 급진적, 비판적, 혹은 포스트모던 연구가 가려지곤 하며 가치중립적이고 탈정치화된 문헌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인용됩니다.

그런 현실로부터 일군의 연구자 집단이 무력함을 느낀다면 비유와 상징의 언어를 전략적으로 동원해야 합니다. 기득권력이 학술 담론의 경합조차 허락하지 않는 폐쇄적인 곳이라면 거기 지식체계는 신화처럼 채워진 것이거든요. 그럴 땐 지배적인 신화구조 바깥에서 탈식민주의나 미학적 낭만주의 등으로 새로운 의미체계를 구성해야만 합니다.

바르트식 상상력을 참조하면 탈신화화 작업은 지배적 신화를 소멸시키는 작업이 아닙니다. 신화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오히려 신화의 입지가 더욱 견고해지니 기존의 신화구조에 힘을 빼는 ‘보다 높은 단계의 (탈)신화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연구자의 미학적 정체성과 앎의 양식을 전혀 다른 기호표현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예시적 활동입니다.

제도권의 텍스트성, 기득권력의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가 비유와 상징입니다. ‘자기의 포이에시스’로 향하는 그런 언어는 고작 낭만적이고 임시적인 수사일 뿐이라고 폄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탈신화 작업은 모두가 같은 말만 하는 지배적 신화체계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으며 ‘벗어나면서도 또 버티는 작업’입니다. 개별적 실천의 합이 더 모아지고 사회정치적 저항으로 구성되기 전까지는 자기배려와 자기변형의 언어를 동원하면서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신간은 연구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고 일반 독자를 상정했기 때문에 그런 논점을 정밀하게 다루진 않았습니다.

□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자주 보신다고 책에 나오는데요. 교수님에게 대중문화는 어떤 의미이고, 글쓰기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연구논문과 같은 논증적인 글쓰기를 주로 했습니다. 서론-본론-결론과 같은 형식성을 지키며 주제일관성을 잘 지키면 논문에서 다루는 실재가 온전하게 분석된 것으로 보일 때도 있었죠. 그러나 사실 논증의 통합체적 형식성은 독자뿐 아니라 연구자의 의식을 제한시키고 이미 학계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 현실을 재생산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하는 연구활동은 실증적인 자료로 결과를 도출하는 일보다 유의미한 연구문제를 발굴하는 작업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 현장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귀한 영감을 주지만 다양한 매체에서 제작되는 대중서사 역시 재미도 있고 요긴하게 참조도 됩니다. 물론 소설, 영화 등의 서사도 순차적이고도 익숙한 의미정보를 모아둔 수준이기도 합니다. 연애사만 봐도 대개 사건이 제시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서로 엇비슷한 통합체의 문법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논증과 서사 등의 프레임이 함께 겹쳐지면, 익숙한 의미구조가 낯설게 혹은 좀 더 입체적으로 보여집니다. 지나칠 수 있는 언어와 기호가 다시 보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이주민에 관한 소설, 영화, 시, 학술논문 등 여러 장르의 텍스트를 겹쳐서 느슨하게 한번 바라보세요. 어차피 세상을 정확하게 본뜬 객관적인 재현은 없습니다. 탐구의 대상에 통찰력이 생기고 익숙한 집착에서 느슨해질 겁니다.  

□ 향후 연구하실 분야는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한국인이 ‘또 다른 언어’를 배우거나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적 상황을 개인의 결핍으로 보지 않고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탐구했습니다. 앞으로도 차별적 경험이나 부적절한 관행이 언어능력과 언어사용의 의미체계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전념할 계획입니다. 예를 들면, 큰 시험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질서, 상용어나 공용어 정책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구조 등을 좀 더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 교수-대학사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학의 힘은 창조적인 개인들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미래 사회의 예견된 논쟁과 변화가 빤히 보이는데 대학은 여전히 집단성, 동질성, 영토성 등을 핵심 가치로 붙들고 있습니다. 학제적이고 탐험적인 지성이 활기차게 일해볼 공간이 의외로 없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기득권력이 긴장하게 되고 개방과 횡단이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경계와 위계가 더욱 굵은 선으로 그어지는 느낌도 받습니다. 일단 실험적으로나마 학제적인 연구를 감당할 수 있는 학자들의 소모임, 학과, 단과대학이라도 개설되고 전폭적으로 지원되면 좋겠습니다. 무슨 시도를 하든 느긋하게 지켜보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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