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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 김재호
  • 승인 2023.08.08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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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_『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신동일 지음 | 필로소픽 | 328쪽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미학적 삶을 살아가기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은 오래도록 언어학을 강의하고 연구한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신동일 교수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저자는 언어학과 기호학 이론을 통해서 언어감수성이라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쉽고 유머러스한 문체와 풍부한 국내외 문화콘텐츠 사례로 풀어낸다. 저자는 먼저 정체성, 관례, 권력관계, 사회질서는 모두 언어/기호의 구성물이고 사랑이나 우정 등 사적인 감정마저도 언어/기호로 만들어진 것을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언어/기호는 너무 촘촘히 짜여 있는 데다가 깊게 우리의 내면에 스며들어 있어서 쉬이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쓰는 언어/기호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도와주는 언어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언어감수성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 언어/기호로 구성된 것'이라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으로부터 만들어나갈 수 있다. 저자는 언어적 전환의 물꼬를 트고자 언어/기호를 분석하는 틀인 언어학과 기호학을 설명한다. 저자에게 언어감수성을 배우는 것은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미학적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강의실의 현장감을 그대로 살리다

이 책은 영문과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전공 강의의 풍경을 그대로 살리려 했다. 우선 교수가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언어학과 기호학 이론을 학부생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나가고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학생과 토론하는 강의실의 모습이 그려진다. 책에는 외교관이나 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 CC(캠퍼스커플), 패션 테러리스트 등 강의실 속 가장 보통의 학생 일곱 명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들과 대화하면서 이 이론이 학생의 삶과 어떻게 공생하는지 드러낸다. 또 일곱 학생의 삶에 언어학과 기호학이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줄지를 쓰고, 그들의 삶과 고민을 헤아리려고 한다. 이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저자의 의지에서 온다.

저자는 MZ세대가 즐기는 에스파의 〈Next Level〉과 아이유의 〈밤편지〉, 〈개그콘서트〉와 〈무한도전〉, 〈미생〉과 〈솔로지옥〉까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사례로 들며 여러 이론의 쓸모를 설명한다. 또한 언어감수성의 렌즈로 본 저자의 독창적인 콘텐츠 분석은 콘텐츠가 생성된 숨은 의도를 보게끔 한다. 왜 장난전화를 하는 사람은 꾀죄죄한 모습으로만 드러나는가? ‘예쁨’과 ‘못남’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정말 사랑이 시작된 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였고 그곳이었을까? 등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편견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밝혀낸다. 저자가 역설하는 미학적 삶은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일 테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드는 최고의 언어학/기호학 개론서

저자는 언어학과 기호학 이론을 소개하고 여러 이론이 끼친 영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기표와 기의, 자의성의 원리와 차이의 원리, 공시성과 통시성, 계열체와 통합체, 랑그와 파롤 등의 개념을 다룬 구조주의 언어학이 그러하다. 저자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주요 개념을 일상적인 사례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런 중에 언어가 대상의 속성을 정확하게 지시하거나 재현한다는 상식과 관행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구조주의 언어학의 급진성을 발견해내려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급진성은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고자 그에 마땅한 단어가 생겨났다는 통념을 뒤집는다. 되려 언어와 기호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의 전환을 이끈다.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은 우리가 쓰는 언어 전반을 겨냥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이자 현대기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쉬르의 이론뿐만 아니다. 야콥슨의 은유/환유, 퍼스의 기호학,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 바르트의 신화학, 에코의 기호적 주체 등의 여러 개념은 우리를 둘러싼 언어 이면의 편견을 드러내는 데 쓰인다. 야콥슨을 통해서는 이항대립 체계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은 특정 기호가 또 다른 기호와 차이를 바탕으로 의미가 성립된다고 본다. 저자는 이를 통해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이분법적 사고를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서 진영으로 갈라서든,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서든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혐오가 언어의 구조로부터 나온 것임을 드러낸다.

저자를 따라서 야콥슨의 통합체/계열체 구조로 〈효리네 민박〉 등을,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으로 〈쇼미더머니〉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또는 바르트의 신화학으로 마음이 설레고 사랑에 빠지는 연애감정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언어/기호에 담긴 의미체계를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비판적 언어감수성으로 인생을 다시 살다

저자는 “비판적 언어감수성은 자아와 타자, 나와 세상, 혹은 정체성과 언어/기호 경관의 문제를 변증법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레마스의 말마따나 “커뮤니케이션은 오해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존재론적 위기, 우리는 모두 다르다라는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언어환원주의 등에 맞선다. 우리의 삶이 단지 기호가 아니며, 우리가 기호로 인해서 형성된 기호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다만 언어를 재배치함으로 우리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남긴다.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냉소와 절망이 만연하지만 저자는 언어적 전환으로부터 미학적 주체로 버티는 삶을 당부하고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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