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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책 복제 없어져야
대학가 책 복제 없어져야
  • 박정렬
  • 승인 2024.03.04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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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렬 한국저작권보호원 원장

 

박정렬 한국저작권보호원 원장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독서를 인생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 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자세를 지향했다. 궁핍한 상황에서도 월광독서(月光讀書), 즉 달빛에 글을 읽었다.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성공적인 민주주의 정착을 이루어낸 중심에는 지식과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있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한 권의 책을 서로 돌려보고, 어떤 때는 옷깃 속에 훔치기도 하며 지식의 욕구를 채웠다. 그러다보니 책을 훔치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정서가 생겼다. 심지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는 말도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의 이면에는 책에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훼손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현대의 책 도둑은 서점에서 책을 몰래 숨기는 행위에서 나아가 종이책 불법 복사, 더 나아가서는 전자파일로 복제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특히 이러한 행위가 학문의 정점이자 지성을 기르는 대학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점에 필자는 깊은 우려를 표한다.

지난해 한국저작권보호원(이하 보호원)에서 2천여 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재 불법복제 현황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1.9%가 전자 스캔본 교재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정식 E-book을 구매한 비율(22.3%) 보다 지인 간 불법 공유를 통한 자료 획득 비율(44.6%)이 두 배 더 높다는 점이다. 여기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한 확보(17.9%)를 더하면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학생들 간 스캔본 불법 공유가 절반 이상(62.5%)을 차지한다.

대학교재의 불법스캔은 디지털 전자기기 이용의 보편화로 학생들이 교재를 전자문서화 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확산된 것도 한 몫을 했다. 실제로 보호원에서 대학가의 하드카피 형태 출판 복제물을 단속한 결과 수거·삭제 수량이 2019년 6천663개에서 2023년 370개로 급감했다. 2023년 전체 출판 불법복제물 이용에서도 복사·제본소 등 오프라인 경로를 통한 불법복제물 이용량은 전년대비 33.6% 감소한 반면, 커뮤니티·토렌트 등 온라인을 통한 불법복제물 이용량은 전년대비 21.6% 증가했다. 

문제는 스캔 복제물은 종이책 복사본과 달리 개인들 간에 손쉽고 광범위한 공유가 가능하여 출판시장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효과가 더욱 크다는 점이다. 심지어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면 누구나 손쉽게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책을 스캔하여 공유할 수 있다. 또한 비용 측면에서 뿐 아니라 무거운 전공서적을 여러 권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실용적 측면에서도 불법 전자파일을 구하고 있다. 학술출판인들은 “대학가의 불법복제로 인해 체감하는 매출 하락은 20~30% 이상으로, 몇 년 더 지나면 학술 및 고등교육 출판 분야가 사멸하지 않을까 우려 된다”고 토로한다. 

학생들은 본인이 무심코 교재를 무단으로 복제하는 일도, 불법복제물을 사는 행위도 모두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공중의 사용을 위해 설치된 복사기기, 스캐너 등에 의한 복제는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된다. 학생이 서점에서 구입한 교재를 스캔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저작권 침해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형사처벌 대상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무인 스캔방 등 대학가의 출판 저작권 침해 실태조사를 통한 대응책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교재 불법복제로 인한 폐단은 대학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무분별하게 복제하고 공유하는 행동이 전체 출판도서 시장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전자책 유통업체 알라딘을 해킹해 전자책 5천 종을 불법 유포하며 대가를 요구한 사건도 특수 범죄 집단이 아닌 평범한 10대 고등학생이 저지른 일이었다. 학생시기부터 저작권 존중 인식을 함양하는 일은 이제 가정을 넘어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기술 진보에 따른 콘텐츠 이용방식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문제는 기술을 악용한 저작권 침해다. 악용 사례를 예방하는 저작권 보호 기술 연구가 시급한 이유다. 이에 발맞춰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보호원의 수요를 기반으로 저작권 침해 콘텐츠 식별·탐지를 위한 AI 기반 저작권 특화 포렌식 수집도구 기술 개발 과제를 2024년 문화체육관광 연구개발 사업으로 추진 중에 있다. 

서중사치(書中四痴)라는 말이 있다. 책과 관련하여 네 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첫째,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 둘째, 순순히 책을 빌려주는 사람, 셋째와 넷째는 빌려준 책을 돌려받으려는 사람과 돌려주려는 사람이다. 책에 대한 애정이 담긴 말이다. 이제, 책을 사지 않고 불법으로 복제하는 사람도 추가하면 어떨까. 책은 뒷면에 적힌 가격표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3월, 들뜬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할 대학생들이 저작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지식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바란다. 

박정렬 한국저작권보호원 원장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정책실장과 해외문화홍보원장, 국민소통실장 등을 지내고, 2022년 9월부터 한국저작권보호원 제3대 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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