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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도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삶도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
  • 김흥현
  • 승인 2024.01.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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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_『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 문학동네 | 152쪽

쉼표로 이어진 소설, 죽음 앞에서 희망을 노래
문학·철학으로 영원의 세계로 전진할 힘 지녀

올라이는 생각한다, 모든 것에 신의 말씀과 영혼이 내재하는 이유다, 그래 그렇지, 그러나 사탄의 의지 역시 작동한다는 것, 그 역시 확신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센지, 그것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 올라이는 생각한다, (16면) 

 

삶과 죽음이 피오르처럼 혼재된 시(詩)소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은 시(詩)소설이다. 주인공 요하네스의 탄생과 그가 죽음에 이른 마지막 장면을 시처럼 서술한다. 책을 펼치면 인간 탄생에 대한 긴박한 대화가 햇살처럼 쏟아진다. 문장과 문장은 쉼표로 이어진다. 마침표는 최대한 억제된다. 짧게 끊어진 대화 사이에 ‘그리고’가 경첩처럼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이렇다.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거기 부엌문 옆에서 서성대지 말고 이 사람아, 그녀가 말한다, 네네, 올라이가 말한다,”(9면) 책의 끝, 장례에 대한 회상 장면에도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저자의 철학적 사유를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싱네는 요한네스의 관 위로 목사가 흙을 던지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중략)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 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하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135면) 모든 문장은 노래 가사 같다. 리듬이 이어진다. 그 리듬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휘감는다. 현실과 상상을 잇는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노래다. 이 노래는 노르웨이 피오르의 깊은 협만을 연상시킨다. 격동하며 흘러가다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렇게 이 책은 시(詩)철학적 요소가 다분하다. 

한편 책의 주제도 선명하다. 삶과 죽음의 혼재(混在)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서사가 경계 없이 섞여 있다. 분량은 짧다. 사유는 깊다. 탄생 이야기보다 죽음 서사에 비중을 둔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하나의 리듬 안에 있기에 삶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은 기억을 통해 생존한다는 확신이 돋보인다. 저자는 인간이 죽음과 삶에 대한 기투(내어던짐, Entwurf)로 전진한다고 추론한다. 이 생각이 단단하다. 그러므로 형식과 내용에 근거할 때 저자가 초점화하는 주제와 사유는 분명하다. 한편으로 인간의 삶은 그 생존의 틈새로 조금씩 끼어드는 쉼표들의 연속이며, 다른 한편으로 최후에 죽음의 마침표가 찍힌다 해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혼재 속에서도 자기 숨을 내쉬려는 인간의 생존 의지를 견인한다. 그것은 죽음까지 아우르는 생의 자유에 이르러 마침표를 남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욘 포세. 사진=위키피디아

쉼표로만 이어진 낭독 소설  

이 책의 서술 기법은 책의 주제와 저자의 사유 방식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우선 현실과 상상이 구분 없이 묘사된다는 점이다. 소설 첫 부분 요하네스의 탄생 장면은 엄숙하면서도 긴박하다. 소설 끝부분 장례식 장면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장엄하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가 뒤엉켜있다. 현실과 상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엄숙하면서도 유쾌하다. 애절하면서도 느긋하다. 평화롭다. 죽은 자의 몸짓인지 산 자의 걸음인지 애써 구분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등장인물은 생동한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현재 일어나는 일인 듯 선명하다. 의성어와 비언어의 혼합은 상상 속 이미지를 더욱 자극한다. 청각적 효과를 강화한다. 그뿐만 아니다. 소리, 언어에 화자의 표정이 담겨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읽는 자의 오감을 일깨운다. 보는 듯 생생하다. 쉼표와 쉼표가 스타카토처럼 이어졌다. 이 책이 낭독에 적합한 이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또한, 이 책의 주요 서사가 흘러가듯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 흘러감이라는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생(生)을 함의한다. 그 경이로운 시작은 물론이고, 그 마지막도 예측불허다. 그는 문장 대부분에서 마침표를 없앴다. 쉼표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로써 인간의 삶을 짓누르는 죽음, 그 마지막 족쇄를 해체해 주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모든 쉼표는 살아있는 것이 내뿜는 들숨 날숨 같다. 이 숨쉬기를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올곧은 생의 전진을 경각한다. 인간의 삶이 죽음을 향해 가는 순례라 해도, 인간은 이 운명의 순례에서 쉼표를 징검돌 삼아 느긋하게 건너가는 것이 유익하다. 삶은 죽음이라는 마침표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쉼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쉼표를 이어 쓰는 것은 저자의 신념을 강하게 반영한 다.

이처럼 현실과 상상의 구분 없이 유영하는 듯한 전개나 쉼표에 의한 서술은 이 소설이 시(詩)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서술 기법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36년 박태원은 이 기법으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 『방란장 주인』에서였다. 그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문득, 황혼의 가을 벌판 위에서 자기 혼자로서는 아무렇게도 할 수 없는 고독을 그는, 그의 전신에 느끼고,” 박태원은 이 문장에서 ‘느끼고’ 뒤에 마침표를 찍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마무리했다. 이 쉼표로써 이 소설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독자의 상상을 자유롭게 열어주는 여운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시 쓰기에서도 이런 기법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1960년대 김수영은 자기 시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장 기호를 활용하여 인간의 자유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생(生)에 대한 자신의 고뇌를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김수영의 시들을 연대기로 재구성하여 자서전을 출판한 김응교의 주장에 따르면, 김수영은 어느 순간에도 마침표 찍기를 주저했다. 고통의 쉼표를 이어갈 뿐이다. 그는 쉼표를 통해 끊어지지 않는 삶의 고통 아래서도 ‘곧은 소리’를 따르려는 삶의 저항을 보여주려 했다. 그의 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적절한 예일 것 같다. 이 시가 출판되기 직전 김수영은 마침표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김응교,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 1921~1968』 (서울:삼인, 2022)]. 자신의 지난한 고뇌를 운명처럼 수용해버렸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최근 시인 심보선의 시작도 마침표 없는 기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작시 「삼십대」에서 마침표를 없애버리고 모든 것을 쉼표로 이어붙인다.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중략)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삼십대”, 『슬픔이 없는 십오초』 , 문학과지성사, 2008) 중 일부) 마지막 ‘살아간다’에는 욘 포세의 마지막 표현처럼 어떤 기호도 쓰지 않은 채 문장을 열어두었다. 시인 심보선은 ‘나 다 자랐다’라는 문장 뒤에 쉼표를 찍었다. 이 표현을 보면, 인간은 다 자라도 여전히 자라가야 할 운명이다. ‘살아 간다’라는 말은 끝없는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서술로 그는 이 시대에 끝나지 않는 젊은이들의 고뇌에 끝없이 공감한다. 이로써 오늘날 삼십대가 자기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세대라는 시인의 공감력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삼십대, 그들은 흔들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세대다. 하지만 다시 흔들리는 삶으로 운명처럼 회귀할 수밖에 없다. 변방으로 밀려나는 사회적 존재다. 삶에 의미 있는 마침표를 서둘러 찍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나지 않는 쉼표와 쉼표로 이어져 흘러가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쉼표는 쉼의 표지가 아니다. 끝맺지 못하는 운명과 연동할 뿐이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시인은 이 지난한 쉼표를 옹호한다. 오히려 그것이 살아갈 이유가 된다고 웅변한다. 그 힘겨운 삶의 변방에서 힘을 북돋는 표지가 된다고 역설한다. 그 마침표를 완성하지 못한 삶도 유의미한 결실이라는 것을 격려한다. 그 쉼표가 만들어내는 고난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보자고 권면한다. 고난에서 용기를 창발하도록 북돋는다.

이처럼 욘 포세를 포함한 여러 작가는 마침표 삭제와 쉼표 활용이라는 기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문학적 의도를 극대화했다. 작가들은 문학이 천착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마침표 너머 쉼표라는 은유를 통해 함축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서술은 오늘날 인간의 겪는 삶의 의의가 마침표를 향한 질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무한한 쉼표의 연속으로 흘러가는 강물에 자기 몸을 맡기는 것을 과감히 제안한다. 마침표를 인위적으로 억제해버림으로써 이들의 문학은 ‘삶이 이해 불가한 고통과 함께 흘러간다’는 것을 다시 일깨운다. 욕망 성취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이다.  

마침표의 수사적 은유(rhetoric metaphor)를 함의한 철학 소설    

우리가 알듯이, 인간은 본래 호모 네페쉬(homo nephesh, 욕망의 인간, 구약성서 창 2:7)다.  마침표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과 욕망으로 분투하는 데 익숙하다. 밀려오는 욕망에 편승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내던지는 존재다. 이 욕망은 삶의 고통을 초래하는 핵심원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강변한다. 마침표를 향한 욕망은 쉬어도 쉬지 못하는 삶을 끊어내고 싶은 간절함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이 무한 쉼표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명처럼 마침표를 희구하는 삶을 동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이 이어지는 삶을 지탱하려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스스로 초래한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자기와 싸워 마침내 자기 고통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마침표의 함의는 다른 관점에서 탐구할 수 있다. 이 소설을 번역한 박경희는 이 소설의 후기에서 욘 포세가 몇 군데 마침표를 사용한 예를 상기시켜 준다. 그에 의하면, 이 소설에서 소수의 마침표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능하지도 않다.”(17면) 이 표현에 따르면, 삶에서 마침표의 자리가 명확해지는 순간이 있다. 즉 마침표는 첫째, 이름을 갖는 사건에서, 둘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 이해 불가한 통치 태도를 용납할 때 등에서다. 이 마침표가 쓰이는 용례들을 보면 공유할 만한 사유가 엿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불가항력적으로 수용해야 할 어떤 ‘결정론적 운명 같은 것’이 있음을 수용하는 맥락에서다. 

따라서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마침표는 인간의 주도적 권한이 아니라 신의 고유한 영역이다. 이 마침표를 신이 주도한다. 인간에게는 쉼표가 삶을 역동적으로 견인하는 핵심장치다. 인간은 무한 쉼표를 감당해야한다. 신은 단 한 번의 마침표로 인간의 삶을 최후에 포용한다. 이 문학적 수사기법으로서 인간의 존재 의의가 선명해진다. 인간에게 쉼표의 연속과 단 한 번의 거대한 마침표는 삶에서 결실을 쟁취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각성한다. 역설적으로 이 쉼표라는 문학적 수사는 모든 사람이 신이 마감하는 완전한 죽음, 그 마침표가 올 때까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지혜를 강화한다. 

한편 마침표를 ‘매듭’이라는 관점에서도 이해해보자. 이는 욘 포세의 쉼표 기법을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매듭은 삶을 규모 있게 마감하는 의미 있는 지혜로 권장된다. 그런데 이어령의 정의에 따르면, 매듭은 잘 묶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잘 풀 수도 있어야 한다[“매듭”, 『우리문화 박물지』, (서울: 디자인 하우스, 2022)]. 다시 말해 좋은 매듭은 잘 묶고 잘 푸는 것(易縛易解=이박이해)이다. 매듭에 담긴 지혜는 끝을 잘 묶을 뿐만 아니라 시작도 잘 푸는 것이다. 이러한 매듭의 문화 기호학적 지혜가 시적 기법으로서 쉼표의 의미에 부합한다. 다른 관점에서 뇌인지 영역에서도 매듭은 쉼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관습적으로 익숙해진 자기 삶의 경험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 힘은 새로운 것을 향해 자기 삶을 추진하는 바탕이다.

즉 인간은 언제나 지나온 자기 삶을 바탕으로 묶었던 것을 풀고, 다시 묶는 일을 습관처럼 체화한다. 고유한 아비투스(Habitus)를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매듭의 의미에 근거할 때, 인간의 모든 삶은 언제나 완전한 마침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쉼표로 구성된다는 통찰은 유의미하다. 이처럼 쉼표로 이어지는 삶의 흐름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불확정한 우연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도 자기 삶을 절제하며 동시에 최적화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침표의 삭제 또는 억제라는 문학적 수사(修辭)기법은 쉼표를 강화한다. 그것이 유한한 인간에게 축복이다. 이런 이해가 쉼표로 이어진 욘 포세의 소설이 갖는 문학적 함의라 할 수 있다. 그의 주제와 서술 기법은 ‘절망’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또 다른 문학적 견해와 폭넓게 연동한다. 

절망으로 삶을 관조하는 절망 소설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이다.” 소설가 손흥규는 “문학적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누구나 무언가 하나씩은 잃고 사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수상 소감(148~149면)] 

소설가 손흥규는 자기 운명 같은 ‘절망’을 문학의 소재로 천착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가는 명확한 시선을 가진 자다. 사물과 사건을 관찰한다. 소설가의 강력한 무기는 관찰하는 '시선'이다. 그 관찰에 최적의 사상을 투사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처럼 소설가의 힘은 언어를 조탁하듯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눈길이다. 손홍규는 '절망'이라는 시선을 유지한다. 그의 문학은 삶의 절망을 절망 그대로 보라는 권면이다. 절망을 빠르게 희망으로 견인하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기실, 절망은 희망의 반대편에 터를 두고 있다. 그러니 누구도 절망보다는 희망이라는 토대를 견고히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손흥규는 절망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반려언어처럼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 절망이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강조한다. 절망으로 욕망하는 인간의 기저를 구축한다. 내 생각을 조금 덧붙인다면, 그가 말하는 절망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한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안내한다. 하여 절망함으로써만 인간은 비로소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입증한다. 나아가 인간의 자기 절망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진정한 '절망'은 인간에게 '궁극적 희망'이다. 인간을 향한 신의 궁극적 구원에 불을 붙이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도화선에 점화되는 순간, 절망은 마침내 궁극적 희망으로 전이된다. 은총이 발화하는 찰나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변곡점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사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그 적절한 답을 제시해왔다. 예를 들어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창간호(1966, 겨울호)에서 백낙청은 ‘문학 한다’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 적이 있다. 

“문학 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인류 전체에게 무한히 귀중한 방법이요 자기 개인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방법일지 모르나 다른 조건이면 또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는 한 가지 방법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남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자기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 되고, 자기가 문학 하는 동안 영원히 따르고 싶은 길잡이일 수도 있으나 자기가 써야 하는 글,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뽑아 든 제비가 <세익스피어>인지 <헤밍웨이>인지 아니면 어떤 무명인사인지, 그것은 그렇듯 큰 문제가 아니다.”(25쪽)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중 한 단락, *원문에 쓰인 한자어들을 모두 우리말로 옮겨 적었다.)
 
같은 호에 실린 프랑스의 문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문학 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문학이 현실에 근거한 비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평은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정신의학적 연구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계획은 야심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계획의 성공을 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출발한다. 만일 일 년 후에 더 많은 동지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우리와 같은 관심에서 우러나오고 또한 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원고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말해 둔다. <참여문학>은 결코 <참여> 때문에 문학 그 자체를 망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은 집단을 위하여 적합한 문학을 마련함으로써 집단에 봉사함과 아울러 문학을 위하여 새로운 피를 넣어줌으로써 문학에 봉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132쪽)[“현대의 상황과 지성”, 이 글은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수록한 글을 정명환이 번역한 것이다(원제 Présentation des Temps Modernes (1945).]  

위에서 보듯이 사르트르는, ‘문학은 현실 비평과 참여를 통해 그 의의가 심화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치밀한 현실 비평이 문학에 동력을 공급하고, 그 동력으로 문학은 삶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웠다. 특히 그가 전후 유럽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 하나의 원고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무엇보다 ‘참여’라는 문학성(文學性)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 주장 속에서 문학의 자리가 오롯이 드러난다. 문학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가장 충실히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현실 참여와 비평이 혼재될 때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한편, 지난 2020년 코로나 19로 삶의 질서가 완전히 와해하다시피 하던 때, 다시 ‘문학의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다뤄졌다. 문학평론가 강경석은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창작과 비평」 2020년 여름호(통권 188호)]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황정은의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를 비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컨대 종래의 혁명이라는 관념을 지양하고 갱신하는 혁명(가령 ‘혁명의 혁명’), 그래서 읽는 이들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과 열린 가능성-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에 놓아두는 혁명, 적어도 이 작품이 말하는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혁명의 재배치,” 20면).

이 주장은 오래전 「창작과 비평」에서 다뤘던 ‘문학의 자리’ 논의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새로운 관점이라면, 코로나 19라는 특별한 전염병의 시대에 문학은 이제 문학 자신과 싸우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다시 말해 문학 속으로 보이지 않게 침투해서 언제 발현될지 모르는 감염균과 대응해야 한다는 문학의 자기반성을 주목한 것이다. 강경석은 문학이 삶에 대한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일으키는 그런 힘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문학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견인한다. ‘비틀거리면서도’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도록 향도한다. 욕망하는 인간에게 ‘절망’, ‘죽음’이라는 길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그 욕망에 저항하는 행위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길 위에 있다. 이 길에서 문학은 거대한 인생 서재를 구축한다. 길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있고, 또한 죽어가는 것들도 있다. 인간이 길에서 만나는 온갖 생물들은 저마다 삶을 관조하는 책의 요소가 된다. 이처럼 문학은 길의 산물이다. 그 길에는 쉼표로 이어진 책들로 가득하다.

문학은 곧 쉼표를 딛고 전진하는 도서(道書, 길책)다. 환상방황(Ringwanderung)이라 해도 유익하다. 쉼표로 이어진 도서가 리듬처럼 한없이 이어진다. 내 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으며 자기 삶을 빙빙 돌기만 해도 좋다. 이 쉼표로 이어진 문학의 길에서 인간은 절망을 노래한다, 혁명한다. 저항한다. 문학의 입장에서는 이 시대에 절망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계로 진격할 수 있다. 문학은 절망하는 용기를 추동한다. 그러나 자주 경험하듯이, 우리 시대는 진실한 절망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희망을 조작한다. 그 조작된 희망으로 삶은 비극으로 굴절된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이 도달한 문학적 공헌은 이것이다. 인간이 삶의 죽음이며, 죽음이 곧 삶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죽음, 그 한계상황으로서 절망은 곧 희망하는 삶을 위한 절망이라고 은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마침표 자리에 쉼표를 찍었다. 인간에게 삶의 완전한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이 시가 된 이유다. 그는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서사를 리듬으로 담아냈다. 삶과 죽음을 비대칭적으로 배열한다. 짧은 생이 긴 죽음을 견인한다.

인간에게 마침표의 자리는 쉼표가 대신한다. 마침표로부터 자유로울 때 인간은 인간답다. 물론 누구에게나 죽음은 삶을 마감하는 최고의 비극이다. 하지만 욘 포세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절망이 아니다. 삶을 관조하는 소설가로서 욘 포세는 절망이라는 렌즈로 현실에서 절망 너머를 조망한다. 그 세계가 현실이다. 문학은 이 세계 속에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다. 우리가 절망으로 걸어갈 만한 생의 의지를 창출해낸다. 오늘 해가 져야만 내일 떠오르듯 삶은 절망할 때 절망을 넘어간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다. 모든 죽음은 아직 절망이 아니다. 기억을 유산처럼 남긴다는 점에서 쉼표다, 희망이다. 

쉼표로 이어지는 영원의 시대로

새해다. 지난 연말,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오후가 기억난다. 그 길에 눈이 아니라 강한 비가 내리기 직전, 바람이 크게 도시를 휘감았던 적이 있다. 차창 밖은 스산했다. 거리의 나무들은 그저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흔들렸다. 살아있는 쉼표 같았다. 그사이에 여릿한 겨울 나뭇잎들도 덩달아 흔들렸다. 결국, 바람에 못 이겨 떨어져 버렸다. 마침표 같았다. 그런데 떨어지기 전, 그것들은 흔들리면서도 서로 잘 어울려 있었다. 그로써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유연하게 삶의 강을 따라 흘러가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그 길에서 바람으로 흔들렸던 나뭇잎 하나하나는 쉼표의 이어짐이었다. 우리가 알듯이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마침표를 찍어야 할 순간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 수 없는 쉼표는 결국 마침표로 귀결한다. 그때 내 눈앞에서 잎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바람에 밀려 도로를 뒹굴었다. 나뭇잎의 삶은 끝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안다. 그 잎들은 떨어짐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나무는 새잎이 돋아날 준비를 시작하고, 떨어진 잎은 거름으로 되살아난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마침표는 삶의 완전한 끝이 아니다. 그 마침표는 아주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을 마무리해주고 새로운 쉼표를 삶으로 북돋운다. 

오늘날 서둘러 마침표를 찍어 버리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려는 욕구에 휩쓸리는 삶이 적지 않다. 자기 이익을 창출하는 사건과 사건으로써만 삶의 의미를 창출하려는 이들이 많다. 마침표를 잘 찍은 사건 속에만 명확한 기승전결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다. 마감하지 못한 채 내달리기만 하면 밀려난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린다. 그 말에 부화뇌동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분명 정해진 문법에 어긋난 몸짓으로는 거북한 시대다. 이익 없는 삶은 얼른 잘라내야 한다. 쉼표는 낭비다. 마감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채찍질한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로서 당연히 이 세계에서 자신을 기투하며 생존해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는 말이 힘을 얻는다.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문학이 추동하는 세계는 다르다. 문학은 거대한 사건보다 가벼운 일상이 삶을 견인한다는 것을 인간의 편에서 입증한다. 그 엄연한 사실을 현실 참여로 논증한다. 도드라지지 못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몸짓, 옹알이 같은 바람의 언어로 들려오는 신음, 눈빛으로 주고받는 무언의 대화가 오히려 삶을 유지한다고 웅변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로부터 문학은 삶의 마지막 순간, 마침표를 찍는 최후의 순간에도 인간은 쉼표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생(生)의 철학을 글로 보여주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글 중에 삼손(Samson)에 대한 서사가 그런 문학의 한 예이다. 그의 이야기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학인 사사기 13~15장에 서술되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 이야기 중 분량적으로 가장 길고, 구성적으로 완벽하다. 그의 탄생과 죽음 장면은 물론이고 결혼과 능력의 원천, 지경을 넘나드는 무력, 비밀, 자기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는 세계관 등이 모두 완벽하게 배열되었다. 이 서술 안에서 그는 최후까지 실패자로 보인다. 

그런데 삼손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최후의 순간에 나타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가 삶과 죽음 경계에 서게 된 이 장면을 한 구절로 클로즈업한다. 나는 이런 고대 서사 기법을 ‘원뿔형 집중서술법’이라고 이해한다. 모든 사건이 이 한 구절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바로 사사기 16장 28절이다. 이 구절은 삼손의 삶을 모두 빨아들인 인생의 블랙홀이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한글개정) 삼손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평생 간과하며 살았던 자기 삶의 사명을 완전하게 인식한다. 준비된 연설은 아니었다. 죽음에 직면한 몸 안에서 생존의 세계로 끄집어낸 순간적인 절규다. 그런데 견고하다. 흔들림이 없다. 확신에 차 있다. 옹골찬 호소다. 견실한 다짐이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회한과 후회이다. 반성과 뉘우침을 새겨넣은 마지막 탄원이다. 

따라서 삼손의 말은 중의적이다. 삼손은 이 마지막 절규를 통해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직 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호소하는 삼손과 침묵으로 듣기만 하는 신, 그리고 호소와 말 없는 응답 사이에 존재하는 이 극한 대립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을 이어가는 쉼표다. 그는 단 한 번 남은 생의 소망을 완성할 기회라고 인식했다. 비록 자신의 신은 침묵하고 그저 무심히 지켜보고, 냉정하게 응답한다 해도 그는 절망으로 절망을 넘어가겠다는 마지막 생의 의지에 자신을 기투한다. 따라서 이 최후의 절망은 그에게 삶의 마침표가 아니다. 쉼표다. 이처럼 삼손의 서사는 삶의 마지막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쉼표를 남긴다.

이처럼 고대와 현대의 서사에 잇대어 본다면 문학은 우리 시대의 절망을 절망으로 관조하도록 치밀하게 작동한다. 멋진 마침표를 찍으라고 추동하는 사회, 서둘러 그 결과에 전력투구하라는 사회, 그것이 자기 삶을 의미 있게 매듭 하는 것이라고 압박하는 세계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마침표 중시 사회는 더는 우리가 추앙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성급한 마침표 중시 세계는 우리를 곤혹스러운 처지로 끌어갈 때가 많다.

지난해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는 이런 사회를 향한 의미 있는 경고다. 이 격언은 우리 시대의 자화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움을 볼수록 의를 잊어버린 시대였다’라는 평가는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見利思義),’라는 당연한 의로움을 사실상 부끄러운 표어로 만들어버렸다. 따지고 들지 않아도 이런 시대의 근원적 원인은 명확하다. 삶에서 쉼표를 소거해 버리고 마침표로만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건물 높이 쌓기를 완성하려는 성급한 욕망 실현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 아니겠는가. 지식과 지위가 높을수록 수많은 마침표를 손쉽게 찍을 수 있다는 특권만 꿈꾸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돌이켜보면, 우리 시대는 채우고 채워도 아직 채우지 못한 욕망의 빈 주머니가 인간다움의 삶보다 더 눈에 들어올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러나 아직 포기는 이르다. 현실 참여와 비평과 철학이 함축된 문학, 특히 시와 소설은 여전히 절망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온새미로 견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욘 포세의 몸부림처럼 삶의 쉼표를 복원해내는 모험을 감내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인간은 자기 마침표를 신에게 양도하는 모험을 스스로 허용해보는 것도 좋겠다. 삶의 최후에 단 한 번 신의 손이 인간의 생에 마침표를 ‘찍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현실에 쉼표를 활용한 문학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들의 제안을 수용해보는 것이다. 삶의 시간이 쉼표로만 이어져 흐르며 반복되는 질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보는 것이다. 태어났다가 다시 저물고, 저물었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삶은 쌓이고 전진한다는 운명을 한 덩어리로 체화해보는 것이다. 이유는 명쾌하다. 문학이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는 견리망의에 마침표를 찍고, 견리사의를 쉼표로 이어가며 영원의 시대로 전진할 힘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흥현 
한국성서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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