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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불가한 세계…그래도 당신의 삶을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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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흥현
  • 승인 2023.10.2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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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_『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312쪽

원제 ‘인생은 로망이다’에서 로망을 ‘소설’로 번역
새로운 로망과 연동하는 인생 소설의 세계를 모험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위의 인용한 글은 1994년, 가수 최백호가 자작곡으로 발표한 노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 일부다. 평론가들은 이 노래에 담긴 ‘낭만’을 대체로 부재의 미학으로 해석한다. 즉 ‘잃어버린 것’ ‘다시 못 올 것’, ‘부재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라는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이에 근거하면, ‘낭만’이라는 말은 손에 잡히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한 원초적 갈망, 부재하는 욕망, 동경하는 미래로 정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낭만은 로망 roman의 단순 음차어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로망’의 소리를 빌려와 낭만으로 옮겼을 때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낭만(浪漫)’이라는 말에는 감성과 감정이 ‘제멋대로’ 흐물댄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보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 도달 불가한 이상을 자기 삶에 자리에서 현실로 향유하고 싶은 갈망이 흐느적거리듯 배어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후 ‘낭만’이라는 말은 세기의 전환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와 방향 없이 흘러나가는 어떤 감성의 향유로 깊이 각인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낭만’을 단순히 물렁물렁한 감성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재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감성의 ‘낭만’이 로망의 동의어로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근대 한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도재학, “근대어 ‘낭만(浪漫)’의 성립,” 「형태론」 22-2(2020), 214-35.]. 

지난 2020년,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Guillaume Musso, 1974~, 프랑스 작가)는 ‘La vie est un roman’을 출간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그의 소설이 번역되었다. 그 제목은 ‘인생은 소설이다’(양영란 역, 밝은 세상, 2020)였다. ‘로망 roman’을 ‘소설’로 번역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뮈소의 ‘로망 roman’을 왜 문자적 대응어인 ‘낭만’이 아니라 의미적 비대칭 관련어인 ‘소설’로 번역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은 독자에게 어떤 문학적 의의를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뮈소의 로망, 그 이성적 개념에 대하여 

뮈소는 ‘로망’이라고 썼고, 번역자 양영란은 ‘소설’(小說) 이라고 옮겼다. 본래 뮈소의 이 책은 미로와 같은 인생을 소설가의 삶에 비유하여 추리하듯 풀어간다. 여기서 그가 선택한 용어 ‘로망’은 전통적 의미에 따르면, 프랑스 소설 문학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실려있다. “‘로망’은 통속 『문학』이다.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 소설. 애정담, 무용담을 중심으로 전기적(傳奇的)이고 공상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주로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1150년의 『테베 로망』 같은 작품에 기원을 둔다.” 이 설명은 로망이 ‘통속 애정 소설이며, 공상 요소가 있는 운문 형식의 문학이다.’라는 것을 함의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로망이라는 용어는 문학 장르라기보다는 기대와 실현 불가를 동시에 의미함으로써 사회 상황에 대한 야누스적 관용어(Janusian idiom)에 가깝다는 점이다. 비록 로망이 동경과 갈망을 시사하는 긍정 의미의 명사로 사용된다 해도 그 부정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로망은 ‘소설’보다 오히려 ‘낭만’과 더 밀접한 동의어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앞서 살펴본 ‘낭만’의 의미처럼 로망 역시 ‘일어나지 않을 일, 아니 일어났으면 하는 일에 대한 미래의 기대와 욕망’을 담고 있다.

심지어 로망은 불가능한 희망, 자기 갈망을 끝내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도 반영한다. 끝내 이룰 수 없는 미완의 버킷리스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로망’이 단순히 ‘소설’에 대응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나의 로망’이라는 말은 나의 소설이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말은 내가 간절히 동경하는,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어떤 갈망의 대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실현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로망’의 부정 의미는 점차 탈색되었다. 그리하여 이야기로만 가능한 가상현실을 반영하게 되었다. 누구나 생각은 하되 손에 잡을 수 없는 어떤 초현실적 세계를 동경하는 실현 불가능한 미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상 안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환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로망은 ‘이성(理性)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理想)’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용어의 의미 변화는 결과적으로 ‘로망’이 우리 사회에서 이상과 현실의 모순 감정을 동시에 대변하는 사회 현상 용어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감정과 이성, 희망과 절망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뒤섞인 삶을 그려내는 사회적 의미를 함의한 것이다. 단순히 소설과 대등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사회적 용어로서 로망에 대해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즉 로망은 신비한 삶을 추동하는 감성으로 여전히 인간의 삶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로망은 인간의 감성 뿌리를 자극한다는 확신이다. 뮈소가 말한 로망은 단순한 감성의 저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치밀한 이성적 사고작용을 정치하게 배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뮈소가 말한 로망은 감성을 품은 이성적 영역을 함의한다.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이다. 사진=https://www.guillaumemusso.com/en

새로운 로망에 대하여 

뮈소가 말한 로망은 감성과 이성의 영역이다. 사전적 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옛 로망은 통속에 근거하면서 ‘궁중’이라는 새로운 세계 안으로 시선을 돌린 전환 시대의 문학이었다. 귀족들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기사들은 음유시인이 되어 기사도를 바탕으로 자기가 구성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귀족들을 위해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속어와 사투리로 이야기를 다듬어 통속적인 전기와 연애담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로망스’였다. 로망은 여기서 파생되었다.

궁중은 세계와 단절되었으나 로망의 도움으로 호기심을 충족했다. 자기 바깥 세계와 이어질 수 있었다. 시인과 작가들은 더욱 치밀하게 로맨스를 구성했다. 이제 음유시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상상은 불가피했다. 상상은 현실보다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로망은 상상하는 세계에 대한 기대와 절망감을 글과 노래로 승화시킨 문학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한편 문학이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한 형태”라는 평론가 故 김현의 간단한 정의[김현, 김주연 편, 『문학이란 무엇인가』(문학과 지성사, 1976)]에 의하면, ’문학은 정신세계를 현실처럼 다스린 이야기다‘라는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여기서 문학은 인간의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다. 문학은 완전히 수사적으로 ‘로망’을 새롭게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 ‘로망’은 단순히 삶의 모방이거나 유희를 위한 새로운 결과물만은 아니다.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들인 인간의 지난한 수고의 장(場)이다. 따라서 ‘로망‘은 문학이라는 관점에서 낭만과 단순하게 호응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성적, 철학적 문학에 상응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룰 수 없는 어떤 절망감을 배태하면서도 이성적으로 희망을 현실화하는 희망문학과 연동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로망은 문학에 의해 새로운 로망으로 더욱 전진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로망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이상의 현실화를 탑재한 로망이다. 감정과 감성에 천착하지 않는다. 당대에 저항하며 땅의 사람들이 겪는 삶을 옹호한다. 이런 점을 반영한다면, ’새로운 로망‘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현실화한 로망이다. 이 시대에 땅에 발을 붙이며 자기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들, 그 땅의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한 일탈을 현실 속에서 이성으로 옹호한다는 의미다.

둘째, 일상(日常)의 사상이다. 보편적이고 경계 없는 개방을 함께 동경하고 그 일상을 공유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구와 갈망이 이성과 의지와 함께 자기 일상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되도록 습속에 저항하는 행동을 담지 한다. 예를 들어 로망이 등장하던 시대, 고귀한 이데아를 버리고 비천해 보이는 육화를 선택한 행동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파(派)가 동경하던 이데아를 버리고 에피쿠로스파(派)가 희구하던 현실 행복에 자기 삶을 내어주려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저 ‘갈 수 없는 나라’를 동경한다. 그러나 동경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세계에 자기 두 발을 딛고 두 손으로 붙잡고 만지며, 느끼고 생각하는 세계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상상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누구나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현실 세계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 분투했다. 삶을 변증하고 웅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망’은 상상을 현실로 웅변하는 노래였으며 철학이었다. 감성에 터를 두고 이성이 다다를 수 있는 이상까지 자기 현실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저항력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었으며 이상의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로망은 오늘날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로망과 문학의 상호관계

새로운 로망은 고대 문학과 긴밀하다. 고대 서사시 일리아스(Ilias)는 그 증거다. 호메로스(Homeros/ Homer)에 의해 하나의 문학으로 정돈한 이 노래는 감성과 이상을 이성에 근거하여 현실에 실현될 ‘로망’으로 극화한 서사시다. 그 일리아스의 첫 구절을 들어보자.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일리아스』 (서울:아카넷, 2023)] 이 구절은 고대 인류가 구술하고 문학으로 남겨놓은 저 웅장한 서사시의 출발을 일깨우는 레베유(Reveille, 출정 나팔소리)같다. 이제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노여움’으로 인생의 험로가 시작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인간의 죽음이다. 이런 서사 구조는 일리아스가 단순한 노래로 인간이 동경하는 낭만을 전달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이런 절망의 서사는 종국에 이르러 성취하는 희망을 함의한다. 이 서사가 모든 인간의 ‘로망’을 글로 조탁하여 철학과 이성 나아가 역동적 삶을 희망하는 지혜의 문학으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리아스는 노여움이라는 감정으로 시작하여 죽음이라는 인간 한계로 마무리하는 삶의 지혜와 철학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새로운 로망의 증거를 보여준다.

호메로스는 이 서사를 통해 인간을 삶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그 감정 너머 남아 있는 희망의 현실을 삶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을 새로운 로망에 근거한 문학의 주체로 상정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인간은 극한 상실과 그 불가항력적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성적, 철학적 서사를 수행하는 대행자로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

한편, 일리아스의 문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서사는 운문과 산문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마치 산문시와 같기도 하고 소설시(詩)이기도 하며, 노래에 실린 가사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노래라는 형식이 특별하다. 고대인들이 리듬에 실어나른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무한히 변주될 수 있는 속성을 갖는다. 그들이 이야기를 변주하는 목적은 단순했다. 이 노래를 통해 기억(memoria)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노래는 기억을 위한 최적의 장치였다. 이처럼 신화에 운율을 실어 들려주려 했던 이유도 이 기억 전승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전(oral tradition)이라는 전달 방식은 활발하게 통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들려주는 이, 노래하는 이에 의해 이야기를 더욱 오래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이 희소했기에 말(語)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유익했다. 기본 줄거리를 흐트러지지 않고서도 이야기는 수없이 덧붙여지고 탈색될 수 있었다. 일리아스와 같은 고대 문학은 말에 의한 노래로써 상상력을 자극한 로망 문학의 시원이다. 무엇보다 신화와 소설 같은 이야기를 운문적 산문에 실어 들려주는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욘 포세(Jon Fosse)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원제 Morgen und Abend, 2000/박경희 역, 문학동네, 2019)은 좋은 예다. 포세의 소설은 주인공 요하네스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특징적인 것은 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로망에 상상의 옷을 입혀 운문적 산문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상상력이라는 것, 그것은 운문에 실린 산문을 통해 이야기, 또는 기억 전승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를 내포하기도 했다.

우선 상상력의 장점은 이렇다. 인간이 인간의 욕구를 발현하고, 그 욕망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이다. 그 힘에 의한 결실은 운문 같은 산문 문학의 발전이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위한 서술기법은 날카롭고 찌르는 듯 정교해졌으나 이야기는 치밀한 리듬을 따라 유연하게 흐른다. 갈수록 이야기의 틀은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자극하며 다양하게 변모했다. 상상력에 의한 문학의 발전은 인간 감성을 바닥에서부터 훑어내며 새로운 인간상으로 견인하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 단점도 명확하다. 상상력은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삶의 범주도 여과 없이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말에 의한 상상력은 인간의 본성을 헤집어 들춰내기에 손쉬운 도구다. 상상력 앞에 인간은 무방비였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언어를 무력화시키고 감성을 치켜세웠다. 허구의 이야기(Fiction)가 사실의 이야기(Non-Fiction)를 점차 압도했다. 과도한 상상력에 의해 인간의 이성적 삶은 점차 현실과 이격되었다. 상상력은 현실을 비현실로 빠르게 전이해 나갔다. 하지만 이런 장단점이 뒤섞였음에도 상상력은 글이 나오기 전까지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의 삶을 이야기 문학으로 견인하는 의미 있는 수레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경시될 수 없는 공헌이다. 이 확장된 새로운 로망이 우리말 번역의 ‘소설’(小說)과 상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냈는가. 이미지=픽사베이

문학으로 전이, 소설의 새로운 의미 

이제 변화가 일어났다. 글이 발명되었다. 글쓰기는 자유로워졌다. 말하기는 빠르게 글쓰기로 대체되었다. 글에 의해 서사 구조가 사방으로 확장되었다. 소재와 내용이 다양해졌다. 복잡한 서사는 오히려 글을 읽는 즐거움을 증폭시켰다. 역설적으로 줄거리는 단순하고 명확해졌다. 주인공, 영웅에게 더욱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의 전승은 궁극적 갈망을 희극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비극으로 전향되었다. 비극이 우세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희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극마저도 희망의 실마리를 버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로 인해 상상은 현실 속에서 구상화했다. 상상력에 의한 이야기는 다양한 층을 이뤘다. 지난 이야기 위에 새로운 이야기가 덧씌워질 수 있었다. 옮겨 쓰기, 다시 쓰기가 일반화되었다. 심지어 줄거리도 변환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듣는 공간이 그것을 읽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역설적으로 서사 구조는 단순해졌다. 결론으로 가는 길이 선명해졌다. ‘악을 누르고 선이 승리하는 것’이다. 권선징악이 보편화 되었다. 다행히 글의 시대에도 상상력은 여전히 견고했다. 오히려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상을 현실에서 구상화하는 노력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소설이라는 정교한 문학 장르가 전면에 등장했다. 

‘소설’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소설은 『문학』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표준국어대사전) 따라서 소설은 과거에 잃어버린 가치를 지금 여기에서 되찾고 싶은 갈망을 탑재한 문학이다.

동시에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금 여기로 끌어들이고 싶은 욕구를 담지한 장르다. 이 점에서 로망과 소설은 서로 같으면서도 그 의미의 결은 다르다. 로망이 경험 없이도 경험하고 싶고 동경하는 상상 속 가상현실이지만, 소설은 경험한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갈망하는 현실 속 상상이라 할 수 있다. 로망은 경험하지 못한 동경인 것이다. 소설은 경험한 동경이다. 이처럼 ‘로망’과 소설은 개념적으로 이미 비대칭이다.

사실, ‘소설(小說, novel)이라는 용어는 태생부터 분량에 관한 정의였다. 소설은 이야기의 길이에 대한 명명이었던 것이다. 단편, 중편, 장편이 그런 예일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실질적인 문제가 있다. 단편은 가벼워 보이고, 장편은 거대한 서사로 보인다는 착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소설’의 가치는 이야기 분량과는 완전히 무관해졌다. 소설은 땅의 작은 자들의 이야기에 더욱 가까워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낮은 자들의 구차한 삶, 작고 가치 없어 보이는 속설 같은 인간 심사에 사상과 철학과 문학으로 수놓은 옷을 입혀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들려졌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는 낮은 땅의 사람들을 중심에 세우고 그들이 만들어내고 또 그들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데 천착하기도 했다.

‘소설’은 소인(小人)을 이해하고, 그들이 경험했고, 기억하고 꿈꾸는 세계가 정당하다는 열망을 문학으로 논증하는 데 이바지했다. 소설은 실현되기를 바라는 미래의 ‘로망’에만 함몰되지 않고 현실 인간이 모질게 겪고 있는 다양한 현상과 상황들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예를 들어, 허균(1569~1618)이 의적 홍길동을 현실에서 그려낸 때를 생각해보자. 그가 글로 남겨둔 이야기인 이 소설은 영웅과 인간의 희망, 어쩌면 절망을 아우르며 미래의 동경을 현실에 투영하는 땅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의 글쓰기는 소설이 어디나 어느 시대나 당대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절망과 희망의 중의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저 영웅 홍길동이 창출해낸 세계를 오늘 이 자리의 독자가 자기 현실처럼 함께 공감하며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희구할 수 있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의 사상적 기능도 명확하다. 모든 일상을 철학이라는 틀로 붙잡아보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소설은 가볍게 밀려왔다 빠르게 지나가는 현실을 그 철학으로 붙잡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사상적 습관을 추동한다는 것이다. 소설가 이승우가 말한 대로 “소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고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장르”[‘실존의 딜레마에 대한 질문’, 『소설가의 귓속말』 (서울:은행나무, 2020), 160.]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읽기 부담 없는 가벼운 이야기면서도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런 가벼움을 옷 입고 자신을 읽어줄 해석자를 기다린다.

자기 깊은 곳에 자리한 알짬을 오롯이 끄집어내 줄 백마 탄 독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소설은 ‘좋아요’만 남기고 사라지는 독자의 자투리를 살짝 잡아당기기도 한다. 손가락 끝에 매달린 ‘좋은 이유’를 마음과 생각으로 좀 더 길게 듣고 싶다는 것이다. 아예 소설은 묻기까지 한다. 어떻게 나를 읽었는지, 어떤 느낌인지, 무엇을 찾았는지 궁금하다고 묻는다. 이렇게 소설은 자신이 철학의 샘이며, 문학의 꽃 중 하나라는 자의식을 은근히 내비친다. 해석이라면, 비평가들의 몫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소설을 손에 들고 그 속에 담긴 로망을 현실에서 찾아내는 이, 그가 해석자다.

이처럼 상상력에 굳게 기초를 세운 새로운 로망이 ‘소설’과 이어진다. 이것은 기욤 뮈소가 인생을 그려내려 했던 저 ‘로망’이 우리에게 그저 소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운 로망과 소설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대응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역동적 등가성( dynamic equivalence)이라는 번역원칙에 근거한 의미범주의 동등성을 고려해야 한다. 두 단어는 기본 원어(roman 로망)와 대상어(소설) 사이에 필연적으로 확장된 의미로 공유되는 비대칭 관계 언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망의 어원은 규범과 특권의 언어인 라틴어(Latin)의 세계로부터 통속적 인생을 옹호하기 위해 스스로 이탈한 문학과 관련 있다. 이 사실이 오늘날 소설의 의미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소설은 ‘로망’이라는 인간의 상상력, 그 갈망과 욕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오히려 그 이상을 현실로 견인하는 문학의 힘을 내재한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을 잘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추동하는 심리적 기제다. 이룰 수 있는 일이면서도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려낸 희망의 문학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오늘날 소설의 의미가 그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화용법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설’이라는 말이 모순적인 감탄사로 변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삶이 신비롭거나 어이없을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상상 이상의 일이라면, ‘와, 한 편의 소설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이없다면 ‘소설 쓰고 있네.’ 같은 말들이다. ‘소설’은 경이로움과 냉소라는 양극의 모순적 감정을 진자 운동하며 삶의 신비로움을 극단으로 표현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소설’은 낙관하면서도 비관하고 비관하면서 낙관하는 중의적(double entendre)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 소설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아울러 인간의 심연을 비추는 한 줄기 빛 같은 문학적 상상을 현실 그 자체로 보여주려는 시도인 것은 분명하다. 소설에 힘입어 사람은 상상 속 로망을 이해 불가하고 불투명한 세계에서 현실처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절망하는 사람들을 희망의 시공간으로 안내하고 머물게 했다. 사람들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로망으로 저 하늘을 마음껏 비상하며 자유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 문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이 포로기 이후 문학을 대표하는 ‘룻기(Ruth)’는 전형적인 로망 문학, 즉 소설이라 할만하다. 학자 대부분은 여전히 이 글을 ‘단편소설(novella, short story)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이 문학은 처음부터 단순한 소설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오히려 오래 숙성된 미완의 로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환국한 이들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절망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상상력, 그 ‘로망’을 현실 속 희망으로 표출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흘러온 전승을 새로운 희망으로 다듬어 절망하는 세대에게 새롭게 전수하기 위한 것이다. 그 무명의 저자는 자기 앞에 놓인 전승을 운문 같은 산문으로 재구성하여 당대 세대가 기억하도록 도왔다. 따라서 룻기와 같은 고대 문학은 상상력에 기반한 로망이 소설로 남겨진 전형적인 예라 할만하다. 이처럼 고대인들에게도 막연한 갈망은 글을 통해 현실에서 자기 몸으로 경험하는 이야기로 확장되어 자기 현실에 남겨질 수 있었다.

이처럼 소설은 상상의 현실이다. 글을 통해 상상 속 영웅을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말로 기억하기보다 글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러웠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이제 글을 통해 이야기 소재는 더욱 세밀해지고 미세해졌다. 그 내용의 범주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에서부터 하늘까지 아울렀다. 현실과 이상을 포괄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소설가에 의해 소설은 환경과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이제는 자신의 속사람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제 소설의 작가들은 신화와 역사는 물론이고 교훈과 훈계를 담아내려고 애썼다. 나아가 동시대와 그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모든 감정과 이성을 숨김없이 서술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소설의 분투와 달리 이성적 현실은 언제나 녹록하지 않다. 선(善)은 단순히 상상만으로 획득되지 않았다. 쟁취해야만 얻어지는 것이었다. 악이 승리하는 모순된 현실은 허다했다. 갈망하는 선의 승리는 낙관할 수 없었다. 주인공의 고난과 위기 해결, 무사히 선으로 귀환하는 이야기로는 더는 통쾌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로망의 성취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역경 중에도 이상적 교훈은 현실에서 비틀거리기는 해도 아주 완벽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낭만이라는 로망이 그 기저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망은 단순한 의미에서 상상이 아니다. 이야기로서 소설만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각 상황에서 감성과 이성이 조화된 글로 정치하게 상상해 낸 확장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인생은 ‘(      ) 소설’이다‘라는 것이다.

상상력, 그 로망에 잇댄 ‘소설’의 재진술-로망은 (     )소설이다     

다시 기욤 뮈소의 책으로 돌아와 보자. 앞서 말한 바에 근거하면, 그의 제목 ‘인생은 로망이다’와 번역본의 ‘인생은 소설이다’ 사이에 큰 해석의 즐거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독자들은 뮈소가 제시한 제목의 ‘로망’에서 영웅적 서사를 동경하는 서구인(특히, 프랑스인)의 정서적 희망을 먼저 읽을 수 있다. 다음에 그 상응하는 번역어 ‘소설’에서는 땅의 사람이 겪어내는 절망 너머 희망을 이성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망’과 ‘소설’은 감성과 이성으로 이분되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문자적 번역어도 아니다. 이 두 단어는 역동적 등가성에 의한 의미의 동등성이 반영될 때 비로소 균형 잡힌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뮈소가 말한 La vie est un roman.의 의미는 ‘인생은 (    ) 소설이다’라는 문장으로 확장할 때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독자들은 이 (     )를 고유한 자기 현실을 담지한 상상의 언어로 채울 수 있다. 모험하듯 개척하며 분투하는 ‘나의 인생’은 그저 이상향 같은 로망에 그치지 않는다. ‘로망은 갈망이 현실로 실현된 나만의 독특한 개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편 로망과 소설은 이 확장된 의미를 통해 이해 불가한 현실에 중의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희망의 시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이 ‘소설’이 땅의 사람들이 추앙하는 현실 같은 이상을 실감 나게 그려내는 문학의 정의와 기능에 충실한 장르다. 이런 점에서 ‘로망’은 문학, 특히 소설로서 인간의 내적 이상을 현실로 구현한다. 또한, 로망의 번역어로서 ‘소설’은 현실에 대한 초월적 감성을 이성적으로 일깨워준다.

또한, 이 로망에 근거한 소설이 인간의 자기 경험 속에 있는 희망의 단서를 공고하게 해준다. 그러니 ‘소설’은 단순히 로망이 아니며, ‘로망’보다 가벼운 의미의 문학도 될 수 없다. 두 단어는 비대칭으로 상관된다. 따라서 두 단어가 균형 있게 상응하려면 이 두 용어 사이에 적절한 해석이 가미되어야만 할 것이다. 기욤 뮈서가 선택한 ‘로망’이 단순히 문학이 아니라 ‘해석된 문학’이라는 근거는 그가 남긴 아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몇 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쓰면서 내 자신이 마치 신이 된 양 등장인물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만들어내고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스무 권의 소설을 통해 하나의 세계-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내가 믿지 않는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는 내 자신을 신이라 믿었다. 소설가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 늘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글쓰기에 착수하는 순간 거침없이 내 멋대로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나는 항상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을 무대에 세우고, 현실에 저항하게 만들었다. 내 소설은 현실을 향해 엿을 먹이는 저항 정신, 상상력을 최고조로 발휘해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내가 바라는 세상으로 채색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는 기존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이니까, 세상의 불공정, 부조리, 부정을 제거하는 행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이니까(230쪽).

이 말에서 번역가가 옮겨 준 ‘소설’이라는 표현을 모두 ‘로망’으로 읽어보자. 그 경우, 저자의 의식 속에서 ‘로망’은 신적 능력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대리자로서 능력을 함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로망’은 불합리한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는 인간의 역동적 의지를 대변해주려는 용어가 된다. 이 점이 기욤 뮈소가 한국의 독자에게 익숙한 novel(소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 ‘로망’을 원래 제목으로 쓴 이유라고 추론하는 유의미한 근거다. 그의 선택은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망의 번역어로서 ’소설‘은 새로운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뮈소의 저 ‘로망’은 인생이 누군가의, 아니 나 자신의 (    )를 채우는 ‘신비한 이야기 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뮈소의 로망을 확장된 의미의 소설과 관련지을 때, ‘인생’은 어떤 의미인가? 이에 대한 한 답은 아마도 로마의 정치인 클라우디우스 케샤르(Claudius Caesar, B.C 10-AD 54)가 남겼다는 권면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각자 운명은 스스로 만든다."(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라고 말했다. 이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자기 삶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동시에 이 말의 이면에는 삶이 생각보다 신비롭다는 관점도 감지된다. 그리하여 자기 삶마저도 이해 불가할 때가 있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케샤르의 말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도 명백하다. 그것은 하늘 위의 관점에 기반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미로 같은 세계를 탐험하며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을 문학의 힘으로 현실로 옮겨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해 ‘모험’, ‘분투’와 같은 어휘를 자주 덧붙여 쓰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과 이해 불가한 현실 속에서 상상력은 인간을 이상과 현실이라는 중의적 세계로 견인하는 힘이 있다. 그 상상력에 의한 세계가 곧 소설로 현실화한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상상력으로 현실화한 소설 그것이 인간의 삶, 즉 인생(人生)이다.

결론적으로, 뮈소의 로망이 ‘소설’로 번역된 것은 인간의 삶이 여전히 ‘신비한 선물’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그 신비는 언제나 모험을 요구한다. 그 모험은 신비로운 삶에 대해 까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대응하는 즐거운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그 저항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평범한 일상에서 신비한 삶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균일하지도 수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뮈서의 책에 대한 유의미한 독법은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번역을 ‘인생은 (       ) 소설이다’라고 확장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인생은 (신이 선물로 남겨 준 아름다운 나의) 소설이다.’ 

자, 이제 독자로서 당신이 로망 하는 그 세계가 어떤 소설로 그려질지 그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이 소설의 첫 장을 열어 보자.

브루클린, 2010년 가을 
6개월 전인 2010년 4월 12일에 당시 세 살이던 내 딸 캐리 콘웨이가 윌리엄스버그의 아파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도중 실종되었다. 

그리고 그 끝을 보자.

소설을 끝냈다. 
나는 삶으로 돌아간다.
 

 

 

김흥현 
한국성서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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