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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는 아빠’로 살아가기
‘마감하는 아빠’로 살아가기
  • 정용건
  • 승인 2023.11.28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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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정용건 강원대 선임연구원
정용건 강원대 선임연구원

한국 고전을 전공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를 결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나 『수호지』와 같은 고전 소설을 무척 좋아했고 역사책에 푹 빠져있었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이 재미있는 것을 더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물론 대학원생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수업 과제·발표문·번역 원고 마감 등 수행해야 할 과업이 쉼 없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모두를 곧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기에, 무엇보다도 작은 글, 작은 발표 자리를 통해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에, 이 길로 들어선 이후에도 별다른 후회는 해본 적 없었다.

그러다 석사과정 수료 이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박사과정에 들어와서는 딸아이도 태어나게 되었다. 나와 닮은(!)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겪어 보지 못한, 기쁨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러한 새로운 감정을 선물해 준 한편으로, 전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된 시간을 겪도록 만들기도 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모든 아이가 그러하겠지만, 우리 아이도 어릴 적부터 유난히 잠이 없어 애를 먹어야 했다. 당시는 대학원 입학 이후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과제 마감은 내일까지, 발표문 마감은 모레까지, 번역 원고 마감은 이번 주말까지…. 어서 아이를 재워야 마감 거리를 제시간에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아이를 보고 있는 이 시간이면 발표문 몇 줄을 더 쓰고, 번역 몇 자를 더 할 수 있을 텐데. 조급한 마음에 여러 방법으로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욱 크게 울어댈 뿐이었다.

바로 이때가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처음으로 후회한 시간이었다. 어떤 삶이든 결코 쉬운 것은 아니고, 어떤 직업이든 나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일찍 취업의 길을 선택해 직장인으로서 살아갔다면, 적어도 저녁과 주말만큼은 온전히 가족에게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어린 시절을 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한동안 떨치기 어려웠다.

이런 미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그래도 못난 아빠를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고 좋아해 준다. 박사논문 최종심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드디어 박사논문을 통과했다고 하니, 당시 5살이던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함께 기뻐해 주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아빠는 뚱뚱한데 어떻게 박사논문을 통과했어요?” 박사논‘문’이라 하니, 무슨 지나가야 하는 문인 줄 알았나 보다. 아이는 아직도 아빠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가끔 물어보면, ‘마감하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매번 하는 변명이란 ‘마감’ 뿐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다.

8살이 된 요즘은 피아노와 종이접기에 푹 빠져있다.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힘껏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전 소설과 역사책에 빠져있던, 단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자신의 흥미를 진로에까지 연결시킨 다른 수많은 ‘학문후속세대’ 동지들 역시도 각자 저마다의 고충 어린 이야기를 품은 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곳을 향해 치열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마감하는 아빠’로서 큰 몸집을 이끌고 논‘문’을 통과하기 위해 매번 낑낑대고 있는 나처럼.

그래도 비록 마주한 현실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을지라도, 정말 좋아서 공부를 시작했던 그때의 마음과 열정만큼은 잊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다. ‘덕업일치’의 삶만큼 보람되고 기쁜 일도 없다는 순진무구한 뜻을 가슴 한편에 오롯이 품은 채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의 마감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모든 동지들, 부디 기한을 넘기지 않고 무사히 제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파이팅.

정용건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BK21사업팀 선임연구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중종대(中宗代) 관료(官僚) 문인(文人)의 학적 지향과 문학의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전기의 문학 지형을 깊이 있게 살피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위원(외부역자)으로서 『일성록(日省錄)』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쉽지 않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넉넉하게 지닌 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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