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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의 한국 마라톤 퍼즐
오리무중의 한국 마라톤 퍼즐
  • 김소영
  • 승인 2023.10.16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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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오롯이 두 다리로만 경쟁하는 마라톤은 가장 평등한 스포츠라고 한다. 지난 8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폐막식과 같은 시각에 열린 시카고 마라톤에서 여자부 우승을 한 에티오피아 출신 시판 하산(Sifan Hassan)은 열다섯 살에 ‘살기 위해서’ 난민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에서 간호사 공부를 하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복잡한 장비나 값비싼 시설이 필요한 스포츠라면 이런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마라톤을 휩쓸고 있는 이유도 그런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물론 마라톤이 가난한 나라의 스포츠라는 해석은 과도한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동아프리카 선수들의 압도적 기록에 대한 운동생리학·역사생물학·사회학·인류학적 분석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는 중국이 아시안게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고, 북한이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남자부 7위, 여자부 6위를 기록한 우리나라는 2010년 광저우 대회 금메달 이후 아직까지 주요 국제마라톤 대회에서 메달이 없다. 

사실 우리나라 마라톤 최고 기록은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2위로 달린 이봉주 선수의 2시간 7분 20초이고, 이 기록은 23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 스포츠 종목에서 점점 기록이 좋아지고 있고, 심지어 넘사벽같은 스포츠 종목에서 깜짝 메달을 따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마라톤은 신기록의 시간이 멈추어버렸는지 퍼즐이 아닐 수 없다.

마라톤이 찬밥 신세가 되었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 마라톤의 대중적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국내 유일의 세계육상연맹 최고 등급 플래티넘 대회인 서울마라톤 참가자는 2005년 1만5천여명에서 올해 3만1천500명으로 늘었다. 게다가 젊은층의 마라톤 인구도 늘어 올해 서울마라톤 참가자는 20·30세대가 64%에 이른다.

이봉주 선수와 동갑내기인 나는 이봉주 선수가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1996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유학생 아줌마의 달리기 실력은 고만고만해서 5~10킬로 정도만 뛰다가 박사를 마칠 무렵 처음 마라톤을 뛰었다. 그게 바로 지난 주말 열린 시카고 마라톤이었는데, 박사 공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 뭔가 끝을 내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 연습 없이 그냥 뛰었다. 

반환점을 돌 때 이미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돌아갈 거리를 보니 까마득했다. 차를 세워둔 출발선까지 기어서라도 가야 집에 돌아갈 수 있는데, 불현듯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 운영인력이 다 철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비까지 내려 혹시라도 누가 출발선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더 미안할 지경이었다. 놀랍게도 어두컴컴한 출발선에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무사히 완주 메달을 받았다.  

참고로 그해 이봉주 선수의 은메달은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소의 1·2위 격차(3초)로 얻은 것으로 이후 올림픽 마라톤에서 메달을 딴 아시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마라톤에는 ‘신기록’이 없다. 42.195km라는 거리 외에는 그 어떤 마라톤도 같은 조건에서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종목도 경기장 사정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마라톤처럼 거리 말고는 모든 환경이 제각각인 종목은 없다. 따라서 신기록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최고 기록만을 얘기할 수 있다.  

사실 사회과학자로서 지난 20년 한국마라톤 성적의 퇴화라는 퍼즐이 1990년대 이후 성장 둔화, 불평등 심화, 세대 갈등, 개인주의 심화 등 한국 사회의 거시적 변화와 맞닿아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개인의 삶에 녹아든 마라톤 역시 이 퍼즐을 이루는 무수한 조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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