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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언문으로 깔보던 생각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글을 언문으로 깔보던 생각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 김영환
  • 승인 2023.10.09 09: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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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여러 생각들
김영환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김영환 부경대 명예교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한문 문명을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한글 짓기가 문명의 큰 흠이며 학문에 방해된다고 보았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사대모화가 지고한 원칙이었고, 학문이나 교육은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읽고 배우기였다. 문명은 곧 중국 문명을 그대로 들여오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同文同軌’로 표현되었다.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옮겨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찾기 어렵다. 

언문은 문명과 학문에 흠이 된다?

한문을 배우고 쓰기는 과거에 급제하여 상류층이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한자는 참글자로서 성현의 슬기를 담은 거룩한 글자인데, 언문은 나날의 말을 직접 적은 것으로서 여자나 노비의 글자였다. 한자 한문이 상대화되고, 언문이 국문으로 공인받은 것은 조선이 중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문자 체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치적이다. 한글을 언문으로 깔보던 생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학술용어 같은 데서 순우리말을 한사코 외면하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경제학 개론에서도 ‘화폐’는 있으나 ‘돈’은 없고 ‘가격’은 있으나 ‘값’은 없다. 철학 개론 책에서는 ‘존재’만 있고 ‘있음’은 없고, ‘인식’만 있고 ‘앎’은 없다. 새로 생겨나는 학술용어는 거의 전부가 영어다. 아직 우리말글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한글을 언문으로 보던 무의식이 이런 데 깔려 있다. 

오늘날 서구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조선의 사대부가 중국을 대하던 태도와 닮은 점이 많다. 영어 몰입 강의가 경쟁력이라는 신화가 넓게 번져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학문하는 자세에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경성제대 중심으로 소개된 유럽 언어학의 폐해

근대 이후에 들어온 학문도 우리말과 글이 당면한 실천적·이론적 과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구에서 발전한 언어학이기에 다분히 소리중심주의적이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겉보기에 글자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훌륭한 글자 한글을 두고도 한문을 극단적으로 숭배해 온 우리 문화사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한자폐지 즉 말글 하나되기, 한글 맞춤법의 정립 등의 시급한 실천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언어학 자체가 달가운 것일 수 없었다. 경성제대 언어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연구자들은 우리의 절대적 관심사인 한글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였다. 이숭녕은 언어학자의 소임이 글이 아닌 말에 대한 연구에 있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에 소쉬르가 쓰였다.  
 
우리는 학술적 방면에서 모름즉이  말을 주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야 글의 환상에 빠지면 안 된다. 쏘슈ㄹ씨의 ‘이약이한 말 그것만으로 언어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명언을 잊지 말자.(이숭녕 「글과 말」, 『조선어문』5, 1932)

그는 ‘언어학자’로서 ‘한글 맞춤법’ 같은 글자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그 학문의 본고장에서도 소쉬르의 소리중심주의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고 글자라는 기호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과학적’  국어 연구를 내세운 그는 외래 학문을 기준으로 우리말글에 대해 주체적 문제 의식을 갖고 있던 주시경 학파의 연구자를 일방적으로 마름질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소쉬르의 랑그에 대한 오해가 깊었다. 소쉬르의 랑그는 실천적 목적을 위한 이론적 구성일 수는 있어도 살아있는 언어적 실재는 아니다. 언어학자들이 이러한 ‘과학적’ 국어학에 매달리는 한 ‘외적’ 현실에 적극적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언어학은) 역사에 무관심하고 사회적 영향의 반경 밖에 있다. 볼로쉬노프의 지적처럼 언어적 실재로서의 소쉬르적 랑그는 실천적 목적을 위한 이론적 구성체로서 언어의 구체적 실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언어의 통시성으로부터 고립되어 언어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언어학의 과학성과 가치판단 문제

‘과학적’ 국어학은 언어를 자연현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실천적인 문제, 가치에 관한 것을 제외하게 된다. 가치판단에서 객관적인 앎이 어렵다고 보고 이를 ‘과학적’ 언어학에서 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언어 ‘외적’ 현실이다. 실천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이론적인 문제는 없다. 볼로쉬노프의 지적처럼 언어적 실재로서의 소쉬르적 랑그는 실천적 목적을 위한 이론적 구성체로서 언어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발언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근대 이후 많은 지식인과 대중의 관심사였던 한글전용 문제도 크게 ‘중세’적 말글 이원화(분리)의 극복으로서 근대화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학적’ 국어학에서 한글 전용에 제기한 가장 중요한 반론, 이를테면 우리말에서 한자어의 무게가 너무 크다거나 동음이의성을 구별하는 것은 곁가지 문제다. 한글은 임금이 지은 것이라 해도 어쨌든 일반 인민의 글자였고 근대 이후 말글 하나되기와 민주주의를 준비하기에 넉넉하였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서 “국문으로만 쓰기는 상하귀천이 다 함께 보게 함이라”고 밝힌 데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 하나되기의 실마리

한글날은 깊은 뜻을 지닌 국경일이다. 지식인에게는 학문하는 태도, 오래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를 넘어 정치적 의미도 매우 깊다. 정부는 올해도 아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경축식을 열어 한글의 빼어남과 세종의 거룩한 정신을 말할 것 같다. 그렇지만 한글날에 정작 필요한 말을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필요없이 함부로 쓰는 영어가 너무 많으니 공공 분야라도 외래어 쓰기를 줄여 나가자는 말을 듣기는 힘들 것이다.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몰아친 지금 한글 맞춤법은 남북을 이어주는 거의 하나뿐인 연줄이다. 북한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말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쨌거나 잘한 일이고 영어에 젖어 있는 남쪽에 생각할 거리를 던질 것이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할 때 북한은 영어를 토박이말로 다듬어서 쓴다고 한다. 비정치적인 분야부터 북한 방송을 개방하면 남북 말글 하나되기에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한다. 

김영환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글철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글철학』이, 함께 지은 책으로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사무침』이 있다. 한글학회 평의원, 국어문화원연합회 감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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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3-10-09 17:25:51
깔보던게 아니라, 세종대왕당시, 새로 창제한 한글에 적응을 못해서 그랬을것. 그리고, 해방이후, 한글 교육으로, 전 국민이 한글을 의무교육으로 익히며 체화되었는데, 자기가 쓰는 한글을 깔볼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