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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 손송이
  • 승인 2023.10.09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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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손송이 서울과기대 IT정책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손송이 서울과기대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박사과정

“여행 잘 다녀왔어요? 그럼 이제 논문을 다시 쓰기로 한 건가요?”

언젠가 이 물음 앞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라고 중얼거리다 눈물을 왈칵 쏟으며 상담센터 문을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논문을 다시 쓰기로 했냐는 물음을 어떻게 저렇게 가볍고 산뜻하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석사 과정 수료 후 일 년 반 이상 학위 논문 쓰기에 매달렸지만 졸업은커녕 논문 심사조차 받지 못해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가 가슴을 늘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작은 걸음을 떼는 일조차 숨이 차고 버거웠다.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과호흡을 견디며 버티다가 논문 제출 연한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지도교수님의 해외 일정을 틈타 비로소 자퇴했다. 그때 여분으로 인쇄해 두었던 자퇴서 양식은 햇빛 가리개 용도로 내 방 창에 아직도 붙어 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다시 이 일을 회고해 보게 된 까닭은 최근에 알게 된 사람 때문이다. 그는 석사 수료 후 졸업하지 못하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휩싸인 채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제 해외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는 일은 어렵겠지만 나는 그가 겪어온 시간을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자퇴 후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다니던 시기에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뼈아픈 원망이었다. “계속해서 논문을 쓰고 또 수정해서 갖다 들이밀어라”, “네가 납작 엎드려라”, “그동안 낸 등록금도 아깝고 투자한 시간도 있고 하니 계속 버텨서 졸업을 해야지”라고 내게 말했던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물론 일리가 있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말과 안쓰러운 시선은 그저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얼마나 더 낮게 엎드려야 하는 걸까. 그리고 대체 왜 엎드려야 하는 걸까. 학교에서 왜 나는 굴종하는 법을 익히고 있나.

한동안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취했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 다음 내가 학교라는 곳에 바라는 것을 공책에 쭉 써보았다. 학문 공동체, 수평적으로 질문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 교수에게 이의제기를 하더라도 보복성 반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곳, 학생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제도나 단체가 있는 곳, 연구 주제를 억지로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곳, 논문 자체의 형식적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논문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그 질문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도 중요하게 고려되는 곳,

학생의 부족함을 경멸조로 바라보고 무시로 일관하거나 그에 대한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족함을 딛고 성장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 비판적인 동료가 있는 곳,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졸업하는 곳, 졸업 후 막막한 심정으로 거리에 나앉지 않도록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학비를 필요로 하거나 장학제도가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는 곳.

그렇게 바라던 것들을 마음에 새기고 다니던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느 미술관 심포지엄에서 인상적인 발표를 하셨던 교수님께 석사 편입에 대한 문의 메일을 보냈고, 그 덕분에 나는 다시 학생이 됐다. 그리고 현재 박사과정 수료까지 두 학기를 남겨놓은 상태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작년에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게재했고 얼마 전에는 학술대회에서 다른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학위 과정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으나 이제는 내가 논문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고 감개무량하다.

예전보다 넓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건대, 어떠한 경우라도 공부를 한다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대학원 생활 중에 극도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도중에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 길만이 길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혹 누군가가 지금 있는 그 외로운 자리에서 더 버텨 보기로 결심했다면, 건투를 빈다. 진심으로. 

손송이 서울과기대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박사과정
서울과기대 디지털문화정책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면서 미술관 학예사로 일하고 있다. 「5·18의 수행적 기념을 위한 광주비엔날레 연구」로 2022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심층인터뷰를 통한 학예노동자의 노동경험과 직무인식 연구 - 한국박물관협회 주관 사립 및 사립대학 박물관 전문인력 지원사업(2007∼)을 중심으로」(2023)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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