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9:05 (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9] 아무것도 본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9] 아무것도 본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박홍규
  • 승인 2023.10.04 1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게리 스나이더② 스나이더의 불교와 생태학
게리 스나이더. 사진=트위터

나는 부끄럽게도 청년 스나이더가 미국에 처음 소개한 책을 읽고서야 한산(寒山)을 알았다.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하게 해진 옷을 입고 나막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중국 당나라의 한산은 체제순응적인 중국 귀족불교를 거부하고 민중불교를 실천하면서 절밥을 짓는 습득(拾得)에게 음식찌꺼기를 얻어먹으며 암굴의 은둔자로 살았다. 그런 한산을 잇는 스나이더가 쓴 『아미타불의 서원』을 나는 좋아한다.

“만일 부처로 된 뒤, 내 땅에서 누구라도/ 방랑자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면, 내가/ 최상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과수원의 들오리들/ 새 풀 위의 서리.” 

앞 구절의 “방랑자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면”은 “가난해서 병들어 죽게 되면” 등등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뒤 구절의 들오리나 서리는 서로 연결되는 세상의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로도 바꿀 수 있다. 불교에 대해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아니 세상살이에 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나무 한 그루만으로/ 족하다/ 아니면 바위나 작은 시내,/ 웅덩이에 뜬 나무껍질 조각만으로도,/ 첩첩이 포개져 꿈틀거리는 산 너머 산/ 얇은 돌 사이로/ 단단한 나무들 빽빽하고/ 그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이 너무 밝다”는 스나이더의 지족에 손뼉을 친다.

영혼과 신의 개념을 모두 거부하는 ‘반본질주의’ 철학

사회에서 시인과 시의 역할에 대한 스나이더의 관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불교 철학이다. 알란 와츠(Alan Watts)와 마찬가지로 스나이더는 명시적으로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의 시에서 불교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서양에서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아서 웨일리(Arthur Waley)의 공자, 『도덕경』, 중국 시 번역본을 읽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Upanishads), 『베더』(Vedas),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를 비롯한 중국 및 인도 불교 고전을 읽었다. 

그는 대승불교의 지혜 지향적 계보가 중국에서 발전하고 오래된 도교 전통을 흡수한 점에 흥미를 느껴 일본에서 6년간 유학을 했다. 그 뒤 미국에 돌아온 스나이더는 명상 수련을 일상생활로 가져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모든 중생의 해방을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에게 불교는 ‘영혼’과 신의 개념을 모두 거부하는 반본질주의 철학이고, 대승의 중심 원리는 변증법적 개념인 ‘비움’(Sunyata)으로 아무것도 본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맥락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딥에콜로지에 영향을 미치다 

스나이더의 불교 이해는 딥에콜로지에 영향을 주었다. 『딥에콜로지- 자연과의 화해를 위한 지혜의 생태학』(Deep Ecology : Living as if Nature Mattered)의 저자인 조지 세슨즈(George Sessions)와 빌 드발(Bill Devall)과 같은 심층 생태학자들도 그들이 도교 고전인 『도덕경』과 도겐의 저서에서 영감을 얻었고, 동양의 전통은 유기적 통합을 표현하고, 생명 중심적 평등의 수용을 표현한다고 했다.

『딥에콜로지』 표지

그들은 그 책을 스나이더에게 헌정하고 “현대 작가들 중에서 딥에콜로지 운동의 감성을 형성하는 데 스나이더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는 “환경계의 논쟁은 인간 중심의 자원 관리 사고방식으로 운영하는 사람들과 전체 자연의 무결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가치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다. 후자의 입장인 딥에콜로지는 정치적으로 더 활기차고, 더 용감하고, 더 유쾌하고, 더 위험하고, 더 과학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구분을 결여한다는 점이 딥에콜로지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한편 딥에콜로지와 대조적인 사회생태학은 생태위기가 사회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회적 위계가 자연을 지배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고 본다. 그 주창자인 북친에 따르면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게 만드는 사회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

1987년 미국에서 열린 제1회 녹색당 전국집회에서 북친은 ‘사회생태학 대 심층생태학: 생태운동을 위한 도전’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논쟁을 시작했다. 딥에콜로지에 대한 북친의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인간 사회 내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 경향, 예를 들어 특정 인간 통치자보다 일반적으로 ‘인류’를 비난하는 경향과 더불어 그 탈역사주의이다. 

딥에콜로지에 가깝지만 사회생태학에도 공감

스나이더는 딥에콜로지에 가깝지만 딥에콜로지가 자연을 정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과 달리 자연을 ‘물리적 우주와 그 모든 속성’으로 보고 그것과 야생 및 황무지를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황무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인간 문화 밖의 자신의 측면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와 다시 연결되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자연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연결하는 사회 생태학에 대해 스나이더는 공감한다. 

또한 스나이더는 북친이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 위계질서의 본질을 고찰하고 지배적 권력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 운동을 촉구하고, 과학이나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산, 은행, 말하자면 정부까지 중앙 집중화한 소수의 소유주가 문제라는 점에도 동의하고, 분산형 에너지 기술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환경이 백인의 관심사이고 일자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흑인의 관심사라는 두 가지 전선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산업 자본주의 암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의 전선이라고 본다. 즉 자연 세계의 파괴를 막으려는 노력과 사회적 관심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 지기 스나이더를 찾아간 야마오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 표지

플라톤을 전체주의자로 비판

스나이더는 시인들과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거리든 농장이든 뭐든지 평범한 것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라”, “책과 서구 문화의 전달자라는 엘리트 의식과 그 모든 허튼소리에서 벗어나라”, “궁극적으로 당신의 마음속으로, 책이 들어가기 전이나 언어가 발명되기 전의 원래 마음 속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한다. ‘평범한 사람들’과 반엘리트주의는 그의 시나 생각의 기본이다. 그는 또한 선불교를 반영하여 자기 이해와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나이더는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공화국에서 모든 시인들을 추방하려고 한 플라톤을 히틀러나 스탈린을 낳은 전체주의자로 비판한다. 스나이더에 의하면 시인들이 “분명히 평범한 이야기인 단순하고 오래된 신화에 머물며 (일반적으로) 공공 정책을 시도하고 공식화하려고 가정하지 않는다. 시인의 거짓말은 간과하기 쉽고 약속이 거의 없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 플라톤의 큰 거짓말은 지도자에게 통제와 권력을 약속하기 때문에 불길하다.” 

플라톤과 반대로 스나이더는 지도자와 국가를 의심하면서 국가를 전체주의 노선에 따른 지구적 조직인 ‘생물권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로 분류한다. 스나이더는 생물권 문화가 “초기 문명과 중앙 집중화된 국가로 (그들은) 하나의 생태계를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지원 체계를 펼치고 계속 나아가는 문화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제도화된 경제 성장으로 우리를 제국주의 문명으로 이끈다”고 비판한다. 

스나이더는, 야만적 본능의 분출을 야성적 삶이라고 하며, 성추행을 예술의 일환이라고 오도하며, 세금으로 숲속의 호화빌라에서 공짜로 살면서 권력에 빌붙기도 하는 소위 국민시인이니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성적 방종은 물론 어떤 권력과도, 문단이나 대학이라는 조직과도 철저히 거리를 두면서 오로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노동하는 시인으로 산다는 점에서, 농부 시인으로 25년을 외딴섬에서 살다 죽은 야마오 산세이의 진정한 친구다.

숨지기 4년 전에 30년 지기 스나이더를 찾아간 야마오의 생생한 글은 『여기에 사는 즐거움』에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고 노래하며 “잡담을 삼가고 침묵을 지키며 걸을 것”을 권한 야마오도 나를 들판의 고요함으로 인도한 좋은 벗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