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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유물이 건네는 말들이 들려…구석기학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
“아직도 유물이 건네는 말들이 들려…구석기학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
  • 최익현
  • 승인 2023.09.20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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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고고학 연구에 평생 바친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

구석기 고고학이 지금의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 박물관을 찾아 저희 팀이 발굴했던 유물을 보노라면 
그들이 어떤 대화를 건네오는 게 느껴져요. 
그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오늘도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 출근해 
유적과 자료를 매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남은 시간도 한국 구석기학과 박물관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1964년 연세대 사학과 조교로 출발했다. 이후 1976년까지 12년 8개월을 연세대 박물관 연구원·수석연구원을 지냈고, 1976년부터 충북대 교수로 부임해 퇴임할 때까지 충북지역 등에서 다양한 한국 구석기시대를 연구했다. 연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설립해 원장·이사장을 맡아 ‘연구 이후의 연구’를 계속했다. 바로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사진)가 걸어온 길이다.

이융조 명예교수가 살아온 연구자로서의 삶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 구석기 고고학’이다. 그가 한국 구석기 고고학의 산증인이자, 한국 고고학 국제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 2006년 11월 9일 열린 그의 정년퇴임 강연에서 “기쁘다. 후회도 별로 없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양 수양개와 청원 두루봉동굴 등 발굴성과를 내놓은 그가 ‘후회하지 않는 연구자의 삶’을 강조했다는 건, 한국 고고학계 1.5세대의 책무를 환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침 2023년은 단양 수양개 유적 발굴 40주년(충북대 박물관팀 조사 기준)인 동시에, 이융조 명예교수가 조교로 손보기 교수의 석장리 발굴에 참여한 시점으로부터 꼭 60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깊다. 이에 이융조 명예교수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해, 그가 걸어온 구석기 고고학 연구 60년의 의미를 짚었다. 이 명예교수는 자신의 구석기 고고학 연구를 박물관 시기, 충북대 시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시기로 편의적으로 구분했다. 

2016년 3월 9일 제22회 용재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융조 명예교수. 사진 출처=yonsei.ac.kr

△퇴임 후에도 구석기 고고학 연구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계십니다. 원래는 천주교사를 연구하려다 구석기 고고학으로 전환하셨다고요.
“2006년에 정년퇴임을 했으니 17년이 흘렀네요. 사실 퇴임을 앞두고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그간 진행했던 연구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지금껏 해오고 있는데요. 어느덧 한국 구석기 고고학과 함께한 세월이 60년이 됐네요.

홍이섭 교수님 문하에서 천주교사를 공부하려고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당시 석장리 발굴에 참여하셨던 손보기 교수님을 돕는 일에 나서게 됐지요. 그게 인연이 돼 손 교수님이 ‘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자’라고 말씀하셔서, 홍이섭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죠.

결국 구석기 고고학이란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게 된 거죠. 평생 구석기 고고학이란 분야를 걸어온 셈인데, 충북대 정년퇴임 강연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후회하지 않아요. 이끌어주셨던 분, 함께하셨던 분께 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구석기 고고학 연구 60년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연세대 박물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박물관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시기, 그리고 충북대에 부임해 충북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현장 발굴에 뛰어들었던 실행 시기, 이후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중심으로 특히 단양 수양개 국제 학술회의를 조직해 한국의 구석기 고고학을 세계에 알리는 시기로 나눌 수 있겠죠.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분입니다만, 연세대 박물관, 충북대와 충북대 박물관 그리고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란 ‘시스템’을 떠나서는 오늘의 제 연구가 성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각 시기는 하나의 시기가 다음 시기를 예비하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어요. 연세대 박물관에서 구석기 고고학을 공부할 수 있었기에 충북대에 부임해 구석기문화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거죠.

특히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국제 학술회의는 정년퇴임 10년 전부터 세계 구석기 고고학계와 교류하면서 한국의 구석기 고고학을 알리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요. 이를 바탕으로 퇴임 이후에 수양개 국제 학술회의를 세계의 학자들과 함께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1964년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은 선생님을 ‘고고학자’로 살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손보기 교수팀이 발굴한 석장리유적은 남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자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라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뒤엎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현장을 60년 연구의 제1기로 겪으셨다는 것도 매우 의미가 깊겠네요.
“석장리유적 발굴을 주도하신 손 교수님께서 함께 구석기를 공부하자고 제안하셨어요. 당시 저는 막 대학원 3학기를 마칠 무렵이었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행히 홍이섭 교수님께서 “큰 학자가 돼라”는 말씀을 주셔서, 조교를 마치고 연세대 박물관 임시직으로 근무하면서 구석기 고고학을 공부하게 됐죠. 그게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말씀하셨듯, 공주 석장리 유적은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입니다. 1차 발굴 도중에 인부가 찾은 유물 가운데 이를 알아본 지도위원 김원룡 교수께서 “아! 이건 핸드액스(Hand-Axe)야!”라고 하며, 발굴 구덩이를 뛰쳐나가 하늘을 향해 유물을 쳐다보셨기에 현장에 있던 우리가 모두 탄성을 지르며 반가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나라 주먹도끼의 연구사는 바로 이 석장리 1차 연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던 일본 학자들의 시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하고요.

석장리유적이 왜 중요할까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의미는 당시 우리의 역사는 신석기시대와 단군신화만으로 역사서술을 시작했는데, 석장리 발굴로 인해 우리의 역사가 구석기시대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밝히고, ‘단군의 조상들’에 대한 시대와 문화를 설정했습니다.

또한, 10년 동안의 석장리 조사와 연구가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모두를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전기·중기·후기에 대한 시대 분류와 몸돌석기·격지석기, 주먹도끼·돌날석기·좀돌날석기·자갈돌석기 등 구석기 고고학의 모든 개념과 주제어가 석장리 연구에서 주장되고 제시된 거죠. 그러니까 결국 구석기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주제가 석장리 연구에서 등장하게 된 셈입니다.”

단양 수양개유적 발굴 당시 모습. 사진 출처=archive.chungbuk.re.kr

△청원 두루봉동굴 발굴은 선생님의 구석기 고고학 연구 60년 구분에서 1기와 2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고고학적 사건으로 볼 수 있겠죠?
“그렇죠. 그때가 제가 1976년 충북대 강사로 출강하던 시절이었어요. 1976년 당시 강승원 기자(〈한국일보〉 청주 주재기자)가 1976년 6월, 대청댐 수몰 지역인 문의장터(1일과 6일장)를 여러 차례 취재하다가 ‘동굴에서 사슴뿔이 나온다’라는 장터꾼의 이야기를 듣고, 두루봉 현장에서 수습한 뼈를 충북대 박물관(당시 조성진 관장)에 연락했어요. 강사로 출강하던 저에게도 알려줘 같이 현장을 방문한 것이 7월 26일 오후였어요.

강 기자의 수습유물과 동굴 안의 여러 가지 뼈를 확인하고, 손보기 교수님께 보고한 뒤, 8월에 충북대와 공동발굴에 나섰죠. 그해 11월에 저는 그게 인연이 됐는지 충북대 교수로 부임하게 됐죠. 박물관 주임교수로 첫 보임을 받고 두루봉 2차 발굴에서 10차 발굴까지 참여할 수 있었죠. 바로 이 시기에 그 유명한 ‘흥수아이’를 발굴팀(박희현·박선주 교수 등)이 학계에 보고했던 것입니다. 물론 충북대 역사교육과 학생들과 함께한 성과라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구석기 고고학이란 학문의 특성이랄까, 극적인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수양개 유적 발굴과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국제 학술회의는, 이제 선생님 연구사에서 한 단계 더 진전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발굴 현장은 해가 쨍하게 나는 날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석장리 때도 그랬고, 수양개 때도 그랬지만,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상황도 피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발굴조사 기간이란 게 딱 정해져 있으니까요. 수양개 유적 발굴은 사실 아픈 대목이 있어요. 수양개 유적 발굴로 인해 두로봉 연구가 뒤로 밀려버렸기 때문이죠. 

단양 수양개 유적은 충북대 박물관팀이 충주댐 수몰지역조사로 1980년 7월 22일에 찾은 유적입니다. 사실 이 조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박물관장이셨던 이수봉 교수의 큰 노력 덕분입니다.

조사를 위해 출발한 날부터 엄청난 비가 내리면서 이틀간 내린 750mm의 폭우 속에 맨몸으로 지표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양개를 찾아 유적으로 확인할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때 참여한 역사교육과 학생들에게는 지금도 특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죠.

첫 시작부터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했지만, 이틀간 라면과 빵만으로 버텨 온 우리 학생들의 노력으로 찾은 검은 돌(쉐일, 판암)은 수양개의 앞날을 밝게 해주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주는 주요 유적임에도 발굴 대상 목록에서 빠진 채 1년이 지났는데, 마침 제가 1983년 3월 박물관장으로 보임을 받게 돼 수양개를 발굴 대상 유적으로 올리고 7월부터 착수할 수 있었어요.

여기에서 꼭 밝혀야 할 사실은 두루봉 흥수굴 조사(10차)를 끝낸 지(1983.1.29.) 1개월 만에 충북대 박물관장으로 임명돼, 자동으로 충주댐 수몰지역조사단장(1983.3~1985.12)으로 수양개를 비롯한 25개 수몰 지역 발굴지의 발굴 진행과 종합보고서를 제출하고, 국가귀속유물의 처리까지도 책임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단양 구낭굴의 1·2차 조사(1986·1988)와 중부고속도로조사단(1986.4~1987.12)과 판교·구리-신갈·반월간 고속도로조사단(1987~1988.12), 주암댐수몰지역조사 참여(1986~1989)로 저의 박물관장의 임무도 끝을 맺게 됩니다.

그 뒤 1989년 미국 메인주립대에서 열리는 ‘1989 세계 정상학자회의’(1989.5)에 초청돼, 드디어 단양 수양개를 세계학계에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단양 수양개의 국제화를 새로운 소임으로 받아들인 거죠.”

△제3기인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시기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국제 학술회의는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궁금합니다.
“1996년부터 매년 세계 곳곳을 돌며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주제의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어요. 요컨대 한국의 구석기 고고학을 세계에 알리자는 것인데, 그간 폴란드·러시아·일본·탄자니아·중국·벨기에·몽골 등 수양개 구석기 유적을 매개로 한국 고고학이 세계 고고학과 연구성과를 주고받으며 구석기학의 발전을 꾀하자는 제안이었던 셈이죠. 지금은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이름처럼 한국 구석기 고고학이 세계와 상당한 수준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가지 더 강조할 게 있어요. 수양개 Ⅵ지구의 3·4문화층과 관련된 것인데요. 이 Ⅵ지구의 3·4문화층은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후기 구석기 기원과 전파에 관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Ⅵ지구를 더 체계 있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해, 후배 연구자들이 저희 세대보다 더 훌륭한 고고학적인 해석을 세계 학계에 제시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면 관계상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한국 구석기 고고학 연구 60년이란 시간은 ‘산증인’이자 연구자로서 걸어온 평생의 과업으로 보입니다. 
“구석기 고고학 연구 60년이라고 하지만, 돌아보면 아주 짧은 순간처럼 보입니다. 아직도 손보기 교수님, 홍이섭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옵니다. ‘큰 학자’가 되어 달라는 말씀이었는데, 글쎄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만 같습니다. 수양개 유적에서 수만 점의 석기를 확인해 학계에 보고했지만, 아직도 연구할 게 산더미처럼 남아 있어요.

앞서도 말씀드렸듯, 저의 연구는 혼자서 일군 성과가 아닙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발굴에 참여했던 제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세계 최고의 ‘소로리 볍씨’(충북 청원군 소로로 오창과학산업단지 내), 단양 구낭굴 발굴 등을 이끌었지만, 이것도 혼자서 한 일이 아닙니다.

저의 발굴 방식을 가리켜 학계에서는 ‘이융조식 발굴’이란 말도 돌더군요. 저는 수천 톤의 흙을 일일이 채로 걸러내 볍씨를 찾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흥수아이’ 인골을 확인할 때 그렇게 한 데서 유래한 것이죠. 

구석기 고고학이란 게 지금의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 박물관을 찾아 저희 팀이 발굴했던 유물을 보노라면 그들이 어떤 대화를 건네오는 게 느껴져요. 그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오늘도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 출근해 유적과 자료를 매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남은 시간도 한국 구석기학과 박물관 문화의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싶어요.”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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