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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 회복해야 철학이 산다
시적 상상력 회복해야 철학이 산다
  • 박병기
  • 승인 2023.09.22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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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 리처드 로티 지음 | 박병기·김은미 옮김 | 씨아이알(CIR) | 150쪽

실용주의 철학자의 마지막 강의록
시인은 지적 확실성의 방해꾼일까

우리에게 철학은 주로 서양철학을 의미한다. 그 서양철학 중에서도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이데아라는 이상(理想)을 전제로 현실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노력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본다는 점이다. 그것이 20세기에 와서 분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고, 21세기 초반 우리 철학계에서도 그런 전통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서양철학을 플라톤에 관한 각주라고 규정했던 화이트헤드(1861~1947)의 말은 이 지점에 주목한 것이리라. 

분석철학으로 철학공부를 시작한 이 책의 저자 로티(1931~2007)는 확실성의 추구라는 매력에 빠져들면서도, 철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다른 면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철학에 기대하는 것이 지적 확실성임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삶에 출현하는 우연과 아이러니를 떠올려보면 그것까지 포용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난한 공부 과정을 거쳐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이야기 철학’이다.

우리는 누구나 말을 하고 또 말을 하고자 한다.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짜임새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게 완성된 말의 덩어리를 우리는 이야기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도 논리에 근거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공감을 불러내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같은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이 상상력은 그 자체로 시적인 특성을 지니는데, 시(詩)는 삶의 리듬을 언어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탐색하는 철학자들과 이야기를 말하는 철학자들 사이의 긴장 관계가 바로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분석철학을 창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합성은 지성의 궁극적인 탁월함이다. 이야기(내러티브) 철학을 창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합성과 상상력이 그 영역을 공유하는데, 왜냐하면 상상력이 낡은 단어들에 새로운 용법을 부여하기 때문이다.”(72~73쪽)

리처드 로티(1931~2007)는 미국의 철학자로서 스탠포드대 비교 문학 교수를 역임했다. 사진=위키백과

플라톤은 시가 지니고 있는 교육적 힘을 경시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구상한 철학자의 왕국에서는 시인을 추방하고 싶어 했다. 시인이 자신의 목표인 지적 확실성의 추구를 방해하는 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지나치는 문제를 주목하게 해주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시인 정현종의 표현을 빌면, ‘시인의 임무는 삶을 고양시키는 일’이고, ‘시는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문학과지성사)

물론 철학이 시와 동일한 것일 수 없고 또 동일한 것일 필요도 없다. 같은 언어에 의지하면서도 철학은 논리에 주로 의존하고, 시는 상상력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 선비나 선사(禪師)들이 잘 보여준 것처럼, 시를 통해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철학이 삶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삶에는 논리와 상상력 모두가 필요하고,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삶의 철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강의록을 번역하고픈 마음이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강의에서 삶을 대하는 진지함과 따뜻함이 함께 느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철학이 확실성의 추구를 포기할 수 없겠지만, 동시에 ‘삶은 이야기다’라는 명제가 지니는 시적 상상력 또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 철학이 시민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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