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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갇힌 서양철학…일상에 숨겨진 ‘화두’ 찾기
상아탑 갇힌 서양철학…일상에 숨겨진 ‘화두’ 찾기
  • 박병기
  • 승인 2023.01.12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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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340쪽

철학 탄생시킨 맥락 생략하고 단편적 논문만 생산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자신의 철학함을 위한 소재

우리에게 철학은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개념이다. ‘오십이 넘으니 남는 것은 철학밖에 없다’거나, ‘도대체 국정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일상의 대화 속에서 철학은 익숙한 개념으로 다가온다.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의 철학은 갖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철학은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서양철학자의 이름이나, 도대체 알쏭달쏭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사무애(理事無礙)나 사단칠정(四端七情) 같은 전통철학의 개념으로 다가선다. 그쯤 되면 우리는 아예 포기하거나 독한 마음을 먹고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눈에 들어오는 철학책 한두 권을 주문하는 양단의 선택 앞에 놓인다.

 

우리 출판시장에서 눈에 띠는 특별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시집과 철학책의 꾸준한 출간이다. 인구수와 비례해서 시인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나라라는 점에서 자비출판까지 포함하는 시집의 꾸준한 발간은 이해할 만하지만, 번역서가 더 많기는 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철학책 출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한 무엇인가』라는 철학책이 수백만 권 팔리기도 한 것을 보면, 우리 시민들의 마음 어딘가에 철학을 향한 열망이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시집과 철학책의 꾸준한 발간은 어쩌면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자취가 남아 있었던 선비와 선사(禪師)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인 지향과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지배층의 언어인 한문(漢文)을 해독할 수 있었던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은 각각 양반과 천민이라는 현격한 신분차이를 넘어서 각자의 철학을 시(詩)를 통해 주고받을 수 있는 교양을 공유하고 있었다. 

백파긍선과 초의의순의 선(禪) 논쟁에 끼어든 추사김정희의 오지랖은 철학 논쟁의 시적 승화로 평가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에게 시와 철학은 일상 자체였던 셈인데, 지금도 고창 선운사길 고즈넉하게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아스라한 조선 문화의 정수다.

 

철학이 곧 서양철학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로운 철학을 향한 열망은 20세기 초반 이후 서양철학에 관한 관심과 적극적 수용으로 이어졌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철학이 곧 서양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근대화된 서양을 어떻게든 쫓아가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으로 이어져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에서 괄목상대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에 유학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서양철학을 소개했고, 국내 대학원에서 공부한 필자 같은 이른바 국내파들도 열등감을 기반으로 더 적극적인 수용자가 되고자 했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져 지금은 서양철학을 제대로 해석해낼 수 있는 학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고, 그 역량을 토대로 우리 현실과의 접목을 적극 모색하는 진정한 철학자들도 소수이지만 반갑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철학계의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여전히 자신이 공부한 곳의 참고문헌만으로 채우는 논문을 쓰면서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사람들이 있고, 그 철학을 탄생시킨 배경이나 맥락은 생략하거나 무시하면서 소개에 급급하는 논문들로 철학지들은 넘쳐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일반시민들과의 소통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철학자들 사이의 소통조차 어려워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철학논문의 전문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거나 이른바 ‘정통철학’은 대중철학과 관계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변명이 가능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칫 지적 유희 이상의 것일 수 없다는 위험성은 여전하다. 

 

철학자들의 흉상이다.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자신의 철학함을 위한 소재여야 한다. 사진=픽사베이

 

화두는 일상의 관심사부터 철학 자체까지 다양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강수정‧박병기, 인간사랑, 2022)은 이런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면서 일반시민과 서양철학의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한 책이다. 공저자들의 다른 저서인 『왜 지금 동양철학을 만나야 할까: 핵심 개념과 인물로 만나는 동양철학』(인간사랑, 2021)의 자매편인 이 책은 일상에서 만나는 경계인 화두(話頭)를 소설이나 영화에서 찾아낸 후에, 그 화두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줄 수 있는 서양철학자와의 만남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화두들은 행복과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같은 일상의 관심사에서 실존적 삶과 철학함이라는 철학 자체의 관심사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것들이다. 

이제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자신의 철학함을 위한 소재여야 한다. 이 당위는 전문철학자나 시민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전문철학자에게는 언어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철학함 과정을 쌓아가는 소재여야 하고, 일반시민에게는 일상의 철학함을 위한 소재여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철학에 대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양철학은 그저 ‘서양’이라는 지역성과 역사성을 배경으로 삼아 등장한 철학사의 한 자락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열등감의 원천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른바 ‘서구 선진국’의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외적인 성취도 이루었기 때문에 남은 문제는 내적이고 정신적인 진전이다. 그 진전은 철학자와 시민이 자신의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화두를 찾아 마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다. 이 작은 책이 그런 시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했다.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윤리를 공부했고,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교육부 민주시민교육자문위원장을 거쳤다. 주요 저서로 『우리 시민교육의 새로운 좌표』,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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