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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원효’로 문학사와 종교사상사를 종합하다
‘의상·원효’로 문학사와 종교사상사를 종합하다
  • 김재호
  • 승인 2023.09.04 0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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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한국 불교시의 기원』(에피스테메 | 368쪽) 쓴 서철원 서울대 교수

문학과 역사학·철학 등의 연구에서 같은 시기 혹은 주제를 다룬다면,

그 인접한 분야의 성과를 공유하며 소통해야 하겠다.

그러나 연구 분야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니까

서로를 존중한다는 게 생각보다 꽤 어렵다.

문학사와 종교사상사를 종합한 묵직한 학술서가 출간됐다. 바로 서철원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한국 불교시의 기원』(에피스테메)이다. 우리에겐 승려로 익숙한 의상(625∼702), 원효(617∼686), 균여(923∼973)가 남긴 불교문학을 톺아본다. 이들은 신분의 구별을 넘어서면서 개인적 성찰과 참회를 강조했으며, 나아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부처의 가르침을 알리는 게송을 남겼다. 의상은 「법성게」, 원효는 「대승육정참회」, 균여는 「보현십원가」를 통해 시어의 압축미를 보여줬다. 

“고전시가의 연구 대상을 늘렸다는 의미가 있다.” 서 교수는 지난달 21일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번 학술서 출간의 현재적 의미를 이같이 강조했다. 서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룬 신라의 불교시는 서정 양식으로서 향가와 가깝고 불교라는 제재도 겹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더불어, 의상·원효·균여의 시에 함유된 메시지 역시 중요하다. “하나하나의 개체가 다 한결같이 소중하다는 상대주의적 인식, 그리고 참회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한국문학에서 처음 강조했던 것은 이들이었다.”

 

서철원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고전시가 전공으로 석·박사를 했다. 경남대 국어국문학과와 성균관대 국어국 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고전시가 수업』, 『삼국유사 속 시공과 세상』을 썼고, 『삼국유사』를 우리말로 옮기고 풀어 설명했다. 사진=서철원

그렇다면 ‘한국 불교시의 기원’은 한마디로 무엇일까? 의상·원효·균여가 이상세계로 시를 통해 펼친 건 바로 ‘서방정토와 화엄불국’이다. 서방정토는 사후세계의 극락정토다. 화엄불국(사)은 불국사의 초기 명칭으로 현실세계의 평등한 이상세계 구현으로 이해하면 쉽다. 

서 교수는 “원효는 참회를 통해 서방정토에 이른다는 실천의 성과를 깊이 파고들었다”라며 “의상은 하나하나의 개체를 한결같이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화엄의 원리를 최대한 간결하고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간결하게 압축된 표현이 일상어와 구별되는 시어의 비유와 상징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불교시의 기원』에는 의상이 원효보다 먼저 나온다. 의도적 배치다. 서 교수는 “의상이 시어의 이론을 제시했던 반면에 원효는 참회라는 실천의 성과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의상과 원효의 초상화이다. 그림=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만 자 ‘화엄경’ 210자로 압축
천 년 넘는 생명력을 불어넣다

“신라의 향가와 삼국유사, 불교시 등 한 시대의 서정·서사·사상을 모두 다루고 싶었다.” 서철원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가 향가·고전시가를 전공하게 된 이유다. 서 교수는 학창 시절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조선상고사』(1948)를 읽으면서 고대 한국 문화와 그 기원에 관심이 생겼다. 

서 교수는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전적으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자료를 영감으로 메꾸어가며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던 열정이 인상적이었다”라며 “실제 역사와는 구별되는 문학적 영감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소회했다. 아울러, 그는 “다만 『조선상고사』는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지만, 지금 우리의 문화와 사상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나라는 신라였기 때문에 신라 향가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불교시의 기원』을 보면, “의상은 한국문학사상사에서 시어의 본성에 처음 주목한 인물이라 하겠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말 그럴까? 서 교수는 “남아있는 자료 현황을 고려한다면, 조심스럽지만 한국문학사상사 전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라며 “의상과 원효의 시대 이전에도 향가가 있었지만, 서정시로서 향가의 언어가 갖추어야 할 점에 관한 고민보다는 가악(歌樂)으로서 기능과 역할에 더 주목했으리라 추정한다”라고 답했다. 

더욱이 서 교수는 “향가가 본격적인 서정성을 갖추기까지 불교적 인간 이해와 내면 성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라며 “원측(612~696)이나 원효의 경우도 상대방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기 위한 수사 전략을 여러 차례 성찰했지만, 의상은 일상어와 구별되는 압축적 비유와 상징을 내세우고 시어의 구축에 본격적으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의상은 약 10만 자의 『화엄경』을 「법성게」 210자로 압축했다. 서 교수는 책에서 「법성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논리적 언어로는 밝히기 어려운 종교적·서정적 차원의 진실을 머금고 있다.” 그래서 서 교수는 “의상이 주목했던 시어의 본성을 활용하여 천 년 넘는 향가의 생명력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장대한 불교의 이상세계를 요약하고 압축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의상은 논리를 뛰어넘는 시어에 착안했다. “『추동기(화엄경문답)』 같은 다른 저술에서 하나를 듣는 게 전체를 듣는 것과 똑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일지 모색했고, 즉(卽)과 중(中)을 통해 어(語)와 의(義)를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가는 비유와 상징의 효과에 착안했다. 「법성게」의 도인(圖印)에서 굽이굽이 휘도는 언어의 물결은 그만큼 역동적인 비유와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분야 존중 부족으로 종합연구 어려워

문학사와 종교사상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여기에 개인사와 과학사까지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개별 연구만 많이 해왔다. 그 이유 중 한 가지에 대해 서 교수는 “서로에 대한 존중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문학과 역사학, 철학 등의 연구에서 같은 시기 혹은 주제를 다룬다면, 그 인접한 분야의 성과를 공유하며 소통해야 하겠다”라며 “연구 분야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니까 서로를 존중한다는 게 생각보다 꽤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왜 저 사람들은 저런 게 궁금할까?’와 같이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대학의 교양교육을 요구했다. 

대학·교수사회에 향가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서 교수는 「찬기파랑가」 7~8행의 “지니던 마음의 끝을 좇으리라”를 언급했다. 

「찬기파랑가」 7~8행(양주동 전 동국대 교수의 해석)

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가를 좇으련다

“기파랑처럼 훌륭한 분의 뒤를 따르리라는 평범한 뜻인데, 그냥 마음을 따른다고 쓰지 않고 마음의 가(끝)를 따르겠다고 했다.” 이 마음의 끝을 따라 하늘의 달부터 물가 저편, 잣나무 가지 위까지 다니며 시선을 옮기는 게 「찬기파랑가」의 내용 전체다. 서 교수는 “인문학이란 이렇게 마음의 끝처럼 희미해진 일을 밝히느라 애쓰고, 여러 부분으로 시선을 옮기며 차근차근 바라보는 건 아닐까”라며 “한 글자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게 탁상공론처럼 비치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작은 하나가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의상과 원효가 추구했던 화엄의 세상이기도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향후 서 교수는 신라 이후인 고려속요에 관심을 두고 연구할 예정이다. “향가가 서정시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신라 불교에 있었다면, 속요의 형성에는 백제의 지역 문화가 이바지했다. 「정읍사」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여성 화자들이 궁중에 들어가 사랑을 노래했는데, 이것은 수도권 남성 화자가 종교적인 내용을 읊조렸던 향가와는 대조적인 특징이다.”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이번 학술서 <한국 불교시의 기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향가·고전시가 전공으로 연구를 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학창 시절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고 고대 한국 문화와 그 기원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자료를 영감으로 메꾸어가며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던 열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실제 역사와는 구별되는 문학적 영감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상고사>는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지만, 지금 우리의 문화와 사상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나라는 신라였으므로 신라 향가로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라의 향가와 삼국유사, 불교시 등 한 시대의 서정, 서사, 사상을 모두 다루고 싶었는데, 이 책을 출간하여 그 꿈을 작게나마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국 불교시의 기원’을 “의상의 시어와 원효의 참회, 그들의 게송과 균여의 향가”(324쪽)라고 적으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상세계로서 ‘서방정토와 화엄불국’이라고 보면 될까요? 그 방법론으로는 ‘일즉다, 다즉일’인 것으로 읽힙니다. “시가 작품에 나타난 이상세계는 내세로서 서방정토와, 공존과 조화를 추구했던 화엄불국 등의 2가지 양상이었다. 서방정토에 이르는 방법과 성과는 다양했지만,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했던 점은 화엄사상의 평등과 조화에 따른 것이었다.”(43-44쪽)

네.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원효는 참회를 통해 서방정토에 이른다는 실천의 성과를 깊이 파고들었으며, <원왕생가>의 화자 엄장은 원효가 직접 가르친 한 사례였습니다. 한편 의상은 하나하나의 개체를 한결같이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화엄의 원리를 최대한 간결하고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간결하게 압축된 표현이 일상어와 구별되는 시어의 비유와 상징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의상을 원효보다 먼저 배치한 이유는, 이렇게 의상이 시어의 이론을 제시했던 반면에 원효는 참회라는 실천의 성과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상이 내세웠던 한결같은 평등의 화엄을 건축 공간으로 묘사한 곳이 (화엄)불국사였으며, 이에 따라 내세에 가까웠던 서방정토는 현실의 눈으로 보고 상상하는 화엄불국의 이미지로 구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국사의 이미지가 화엄불국에 대한 상상력과 시적 표현을 더 폭넓게 이해하기에 이바지했습니다.

△원측과 의상을 비교하면서, “의상은 한국문학사상사에서 시어의 본성에 처음 주목한 인물이라 하겠다.”(69쪽)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 의미는 불교문학에 국한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한국문학사상사 전체를 통해서 적용되는 의미일까요? 아울러, 시어의 본성을 꼭 “논리적 언어로는 밝히기 어려운 종교적·서정적 차원의 진실을 머금고 있다”(69쪽)라고 보아야 할까요? 일상을 묘사하거나 논리적 인과 관계를 표현하는 시들도 있지 않나요? 10만 여자의 <화엄경>을 210자로 압축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일까요?

남아있는 자료 현황을 고려한다면, 좀 조심스럽지만 한국문학사상사 전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의상과 원효의 시대 이전에도 향가가 있었지만, 서정시로서 향가의 언어가 갖추어야 할 점에 관한 고민보다는 가악(歌樂)으로서 기능과 역할에 더 주목했으리라 추정합니다. 향가가 본격적인 서정성을 갖추기까지 불교적 인간 이해와 내면 성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앞서 원측이나 원효의 경우도 상대방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기 위한 수사 전략을 여러 차례 성찰했지만, 의상은 일상어와 구별되는 압축적 비유와 상징을 내세우고 시어의 구축에 본격적으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말씀처럼 모든 시어가 일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시어도 의사소통의 수단이므로 논리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어가 일상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한 편의 시에 일상의 논리를 벗어나는 시어가 단 하나도 없다면 역시 훌륭한 시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의상의 경우 정말 적은 수의 글자로 방대한 <화엄경> 전체를 보여주려고 했으므로 논리를 초월하려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였지만, 더 가벼운 제재의 서정시라면 그렇게까지 일상과 거리를 두지는 않습니다.

의상이 <법성게>에서 10만여 자를 210자로 줄이면서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당연히 많은 글자를 그렇게 과감하게 줄일 수 있을까였겠습니다. 그러므로 <추동기(화엄경문답)> 같은 다른 저술에서 하나를 듣는 게 전체를 듣는 것과 똑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일지 모색했고, 즉(卽)과 중(中)을 통해 어(語)와 의(義)를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가는 비유와 상징의 효과에 착안했습니다. <법성게>의 도인(圖印)에서 굽이굽이 휘도는 언어의 물결은 그만큼 역동적인 비유와 상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210자로 화엄사상 전체를 압축하려는 목적의 강렬함 때문에, 의상은 <법성게>를 창작하며 일상의 논리를 벗어난 시어를 여러 차례 구사했습니다. 이 무렵 이후의 향가는 <법성게>만큼 과감한 압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런 성격의 표현은 작품마다 1, 2차례 정도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도와 분량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의상이 주목했던 시어의 본성을 활용하여 천 년 넘는 향가의 생명력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의상과 원효의 성취, 나아가 불교용어와 개념에 관한 이해는 향가의 시어 구축에 이바지했으며,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개개인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다.”, “의상과 원효의 시어는 문학과 사상의 만남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7쪽), “말하자면 <보현십원가>에 이르러 의상과 원효의 사상은 다시 만난다. 향가에 두루 나타난 불교적 표현의 의미, 의상이 전파한 관음신앙이 8세기 후반 <도천수관음가>로 숙성했던 성과, 화엄의 이상향이 조선 전기 불교가사의 자연관 무정설법으로 확장했던 흐름 등은 모두 의상이 싹 틔우고 원효가 꽃피운 결실이었다. 그리고 균여를 거쳐 한국 불교시의 열매가 끊임없이 열렸다.”(324쪽) 이번 학술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현재적 의미라면 학술적인 것만 뜻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먼저 고전시가와 불교시 연구 각각에서 갖는 의미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고전시가를 연구할 때, 고전시가만 연구하는 방법론은 한계에 도달했고 연구 소재도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고전시가만 읽어서는 이제 새로운 쟁점을 만들 수 없고, 다른 장르나 문화, 예술 소재까지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룬 신라의 불교시는 서정 양식으로서 향가와 가깝고 불교라는 제재도 겹치므로, 고전시가의 연구 대상을 늘렸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대문학 중에 불교시나, 불교 잡지의 여러 모색에 관한 연구가 늘고 있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삼국 시대 이래로 천 년 넘게 한국의 지성은 불교가 중심이었고, 조선 시대라는 단절이 있더라도 그 자취는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근현대의 불교시 연구에 호응할 만합니다.

학술성 바깥의 현재적 의미라면, 의상과 원효 그리고 균여의 시에 나타난 메시지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하나의 개체가 다 한결같이 소중하다는 상대주의적 인식, 그리고 참회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것들을 이 세 사람만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한국문학에서 이를 처음 강조했던 것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향가와 삼국유사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현재 사회는 거칠고 과격한 모습, 남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남을 존중하지 않으니 나도 존중 못 받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가치도 사라져갑니다. 의상과 원효가 말한 상대주의적 평등과 참회가 이런 병폐의 직접적인 처방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시사점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학사와 사상사, 그리고 종교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존 연구의 흐름은 개별적으로만 연구가 돼 온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개인사나 과학사 등도 포함해 통합적으로 연구가 되어야 할 텐데,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말씀처럼 문학사와 종교사를 포함한 사상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통합적인 연구가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지역의 역사학자께서 문학 전공자들이 수십 년 동안 놓쳤던 것을 당신이 처음으로 찾았다며 의기양양하게 저를 가르치려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렇게 마냥 놓치지 않았고 몇 편의 논문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 분만 그랬던 건 아니고, 역사학 논문에서 문학 쪽의 신화나 삼국유사 연구 성과를 자세히 조사, 인용하지 않는 경우가 실은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 연구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시중에서 많이 읽는 어떤 문학사 책에 성리학이며 실학 관련 내용이 많이 실렸는데, 그 저자가 해당 주제에 관한 철학자들의 성과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문학 연구에서 지리나 공간, 여행 등에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지리학 이론이나 연구 성과를 그만큼 거론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연구 분야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니까 서로를 존중한다는 게 생각보다 꽤 어렵습니다. 제 전공인 고전시가에 가장 가깝다는 국악하시는 분들과 말씀을 나누어 보면, 오히려 가까워서 서로의 차이에 놀랄 때도 꽤 있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런 게 궁금할까? 왜 저런 게 쟁점이 될까? 어쩌면 그런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기에 필요한 게 대학에서의 교양 교육이 할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교수사회에 추천하고 싶으신 향가·고전시가 구절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불교시가 아니라서 이 책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향가 <찬기파랑가> 7~8행에 “지니던 마음의 끝을 좇으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파랑처럼 훌륭한 분의 뒤를 따르리라는 평범한 뜻인데요. 그냥 마음을 따른다고 쓰지 않고 마음의 끝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의 끝을 따라 하늘의 달부터 물가 저편, 잣나무 가지 위까지 다니며 시선을 옮기는 게 <찬기파랑가>의 내용 전체입니다. 

여기서 끝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가 무엇일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희미해지는 그분의 마음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다는 안간힘일지, 혹은 그분의 마음이 너무나 대단해서 나는 다 이어받지 못하고 고작 끄트머리 일부만 겨우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함일지, 도리어 그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이어받겠다는 결연한 의지일지, 이도 저도 아닌 다른 무엇일까? 아니면 이걸 다 포함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끝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뚜렷이 지정할 수 없었으니, 제게는 기파랑의 마음의 끝을 좇을 자격이 없습니다.

인문학이란 그렇게 밝힐 수 없는 일에 안간힘을 쓰며, 겸손함과 결연한 의지 사이에 줄타기하는 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한 글자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게 탁상공론처럼 비치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작은 하나가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의상과 원효가 추구했던 화엄의 세상이기도 하겠지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나 무시하는 분들 모두 이 작은 하나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추후 어떤 연구나 저술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이제부터는 다음 시기의 고전시가인 고려속요에 관심을 가져야겠지요. 향가가 서정시로 성장하게 된 한 계기가 신라 불교에 있었다면, 속요의 형성에는 백제의 지역 문화가 이바지했습니다. <정읍사>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여성 화자들이 궁중에 들어가 사랑을 노래했는데요. 이것은 수도권 남성 화자가 종교적인 내용을 읊조렸던 향가와는 대조적인 특징입니다. <고려사·악지>는 삼국 중 백제 음악과 속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속요의 시어와 표현은 이후의 시조, 가사로 이어지는 동시에, 백제 유민 출신 시인들이 일본의 <만엽집>에 참여하며 동아시아적 범위로 확장하였습니다. 시조와 가사 그리고 다른 나라의 시가까지 포함하여 속요의 역사적 위치와 가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전공인 고전시가가 워낙 인기가 없어서, 작년에 나름대로 쉽게 풀이한 강독 교재를 하나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 다루지 못했던 작품과 이론을 마저 다른 책으로 내고 싶습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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