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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노동 연구하는 불안정노동자
불안정노동 연구하는 불안정노동자
  • 홍단비
  • 승인 2023.09.04 0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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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홍단비 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학부 졸업 후 취업’의 궤도에서 이탈해 ‘공부를 전업’으로 삼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 자신을 어떤 사회·경제적 위치에 두고 어떤 방식으로 정체화해야하는지를 고민해볼 수밖에 없는 순간에 다다르면, 노동계급이라는 용법이 나의 삶에 끈덕지게 따라붙었던 일상적인 생활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별다르게 ‘전업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배경 때문에 ‘전업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은 오롯이 빚으로 메웠고 이외의 생활비는 반드시 추가적인 노동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동안 과정생으로 살아오며 내 생활의 과업을 상기해보면 공부를 뒷받침하려는 에두른 길로 ‘돈 버는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한두 달은 버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고, 급전이 필요한 시기가 오고야 말 때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단기적인 일거리를 탐색했다. 우스갯소리로나 자신을 현장연구자라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그 말은 종내 혀뿌리에 씁쓸함을 남기고 말았다.

기왕에 석사논문을 써내고 박사과정까지 진학했다고 한다면 그래도 ‘연구자’의 자격은 갖춘 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불안정노동을 연구해보고자 한다’는 정도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 더 익숙하다. 이 고민은 석박사과정을 통틀어 한 번도 불안정한 노동을 멈춘 적 없는 나를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만들고 괴롭히는 만성적인 고뇌 또는 스트레스로 침윤돼 있다. 또한,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연구가 주업이 돼야 하는 학계에서, 나 자신을 주변인의 위치로 밀어내고, 이중의 과업이라는 무게는 연구를 하면서도 불현듯 생계에 대한 불안감으로 들이쳐 연구에의 몰두를 흩뜨린다.

모르긴 몰라도 학교를 옮겨 다니고, 학교 밖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생계에 대한 우려 없이 연구만 할 수 있는 학생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알음알음 이어지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도, 경쟁률이 압도적인 장학지원 프로그램에 선발될 기회도 제한돼 있기에 대학원 과정생의 생계형 노동은 주변부 노동으로 밀집될 확률이 압도적이다. 얼마 전에는 인문사회과학 계열 분과의 출연연 사업비가 대폭 삭감될 예정이라는 정부의 발표까지 나왔으니 걱정은 배가 된다. 

더불어 학교 자체에서 지원되는 장학제도의 도움을 받으려면 노동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4대보험에 가입된 아르바이트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다. 장학금 이중수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의도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학생들에게 지원해줄 수 있는 금액이 매우 협소하게 책정돼 있다는 소리다. 여러 층위의 한정된 조건 아래서 성실함은 둘째 치고 과정생들이 연구에 충실히 집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부가적인 조건’이 학생을 오히려 불안정노동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연구자로서의 정체성 형성이 ‘연구실적’의 축적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남보다 다소 뒤늦은 논문게재로 연구실적을 만들면서 나를 연구자로 소개할 수도 있겠다는 소박한 자신감을 갖게 됐지만, 논문을 쓰던 시기에는 생계노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경험은 오히려 앞으로 내가 또 다른 연구실적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연구자, 혹은 ‘노동자이자 연구자’라는 경계적인 정체성을 가진 과정생은 어떠한 환경에서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될까? 

물론 연구자라고 해서 노동자라는 정체성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정체성의 문제를 단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혹 경로의존적인 일련의 선택으로 인해서 ‘전업으로서의 공부’를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 학생이라 하더라도, 더 나은 조건을 바탕으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으려면 학계를 소관하는 제도적 차원의 발전되고 광범한 지지대와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강의실에서 계급과 계층, 불평등에 대해 논의하지만 막상 하나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학생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문화자본과 경제자본 사이의 가장 큰 격차를 담지하고 있는 대학원생의 상황을 단순 밈(meme)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학계 재생산을 위해 더 심도 깊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홍단비 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청년의 불안정노동 경험과 ‘우회적 이행기’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앙대에서 노동사회학을 주 분과로 삼고 불안정노동(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불안정노동을 인구학과 접목시켜 출생률의 경향을 살피는 시도를 하는 중이다. 학교 밖 연구자 네트워크인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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