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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인가 면죄부인가
개선인가 면죄부인가
  • 홍준성
  • 승인 2023.07.17 0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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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홍준성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예전에 들었던 학부 강의에서 지역 인재 유출 문제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담당 교수의 논리는 깔끔했다. 과도한 경쟁 풍토와 수도권 집중화가 결합하면서 대학 서열화가 가속화됐고, 이 과정에서 지방대가 싸잡아 이른바 ‘지잡대’로 묶여 비하되면서, 학업 성취가 뛰어난 청년 인구가 수도권 대학으로 몰리게 됐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당연지사 한번 지역을 떠난 청년은 고향으로 내려와 취업하는 경우가 매우 적다는 통계도 덧붙여졌다. 참고로 그날 담당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부산의 장래가 그리 밝지 않다고 경고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옳은 예언이었던 걸로 밝혀졌다. 얼핏 강의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지역 인재’라는 말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의 지식인 대부분은 수능이건 내신이 건 간에 국내의 암기식 교육의 폐단을 뻔질나게 비판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여기에 고분고분 잘 적응한 모범생은 성능 좋은 범인일 뿐, 인재일 순 없지 않나? 기왕 희망을 걸어보겠다면, 비록 시험에선 오답일지언정 출제자의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를 가진 이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당시 담당 교수의 시선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은 인재가 아닌 셈이었다. 대학에서 새롭게 행해질 교육 과정 역시도 무의미한 것처럼 전제됐다.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지역 인재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물론 지방대생으로서 이를 지적하기는 만만찮다. 자칫 모난 피해의식으로만 비칠 수 있을뿐더러, 대학 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인프라 격차와 실제적인 청년 인구 유출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강의에선 침묵했고,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다시 회귀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인 대학원에서였다. 사석에서 잠깐 지역 격차에 대한 화두가 던져진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열린 학회에 갔다 온 선생님 한 분이 정보와 네트워크 자원이 서울에 너무 집중되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비평을 꺼낸 것인데, 같이 있던 대학원생들의 맞장구 사이로 이런 말이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에 똑똑한 애들이 다 모여 있어서, 참 문제야.”

설렁탕집 주인에게 욕을 할 순 없었기에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뭔가 뒤틀린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현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장기간의 집중화 현상으로 인해 대학의 절대적인 수 자체가 수도권이 월등하며, 이는 곧 상호 교류의 용이성을 의미한다. 구태여 이 자리에서 학적 토론과 논평이 활발히 진행되는 것의 이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역량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곤란하다. 기회가 부족했던 것과 기회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인 까닭이다. 지방대 멸시의 정서를 내면화해버린다면, 대관절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지역 인재 유출을 걱정했던 교수와 지역 격차를 토로한 선생님의 의도의 선함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엔 별 관심이 없다. 비판이나 분석의 이름으로 은연 중에 주입되는 것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바 무능의 고리에 묶이는 순간 미래는 질식하기 때문이다.

구조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문화 자본의 압력을 도외시한 채로 정신력을 부르짖는 것만큼 공허한 것도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는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구조적 사유에 너무 심취할 때면 주체의 역량을 터무니없게 평가절하하기 쉽다. 둘째, 마치 맹수가 잡은 사냥감을 놓아줄 의무가 없듯 구조도 지방대 박사과정생을 구조해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되레 구조주의적 호소는 무엇보다 구조의 필수 부속품이기도 하다. 내용은 전혀 중요치 않다. 내용은 연막에 불과하다. 관건은 호소하는 행위 자체인 바, 이 구도 속에서 분석은 주체의 행동 불능을 정당화하는 족쇄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 구조는 전체가 아님에도 전체가 된다. 하소연이 아닌 전략화해볼 요소가 있음에도 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이 된다. 하여, 치열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찾는 건 개선인가 아니면 면죄부인가? 

참고로 면죄부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 교훈은,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홍준성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부산대 철학과에서 「발터 벤야민 수집 개념 탐구」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정치철학과 기술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분회에서 사무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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