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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려주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
사람을 살려주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
  • 김소영
  • 승인 2023.07.03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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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올해도 절반을 넘어가면서 잔뜩 쌓인 메일을 정리하다 올초 다산포럼 송혁기 선생님의 ‘닭을 잘 기르는 법’을 다시 읽어보고 중국의 세계적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아버지 얘기가 생각났다. 

‘닭을 잘 기르는 법’은 사실 대학의 위기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글이다. 이 글에 유배 중인 다산 정약용이 둘째 아들에게 닭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를 자세히 언급한 대목이 소개되어 있다.

일단 사대부 집안 부자(父子)가 뜬금없이 양계를 논하는 게 의아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배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어 생계를 위해 닭을 기르게 된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탄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칭찬한 내용이다. 

저속한 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품위가 생기는 것이고, 닭을 키우는 것도 관련 서적으로 공부하고 갖가지 방법을 시도하면서 체계적으로 효율을 높이라는 당부였다. 단순히 양계 기술을 넘어 닭을 소재로 시도 쓰면서 세속적인 일에서 맑고 높은 품격을 갖추라는 당부도 있었다.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현대 예술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의 미술감독을 담당했으면서도, 체제 옹호로 돌아선 장예모 감독과 달리 끊임없이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 인물이다. 그가 중국 정부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아버지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의 유명한 시인으로 문화혁명 때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하방(下放)을 당해 신장 지역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유폐되어 20년을 살았다. 그런데 아이 웨이웨이가 기억하는 당시 아버지의 모습은, 평생 글로 살았던 사람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변기 청소를 한없이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마치 글을 쓰듯이 세밀하고 꼼꼼하고 차분하고 정성스럽게.

한 사람의 20년을 송두리째 앗아갔고 추정컨대 2백만 명이 스러진 그 잔인한 문화혁명에 대해 중국 정부는 지도자의 착오로 인한 재난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재평가나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비극과 불행, 극단의 상황에서 사람이 화장실 청소처럼 사소하거나 닭 기르는 것처럼 하찮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사실 모든 것이 박탈된 사람에게 화장실 청소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고, 많은 것이 부정된 사람에게 닭 기르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정약용은 둘째 아들에게 닭의 생태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 보면 이전에 못 보던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고민의 과정이 깊어지면 세속의 일에서도 옳은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의 위기는 인구절벽의 축소사회, 파괴적 기술혁신에 따른 교육과 직업의 대전환, 성장한계와 지역소멸 등 거대 담론이 경합하는 장이다. 문득 사람이 사라지고, 지역이 사라지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기대와 상식이 사라질 때 우리를 지탱해줄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정작 사람을 살리는 것은 고매한 담론이 아니라 남루한 하루를 버티고 그 안에서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마음가짐일 것이다. 우리 대학이 이런 마음가짐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다.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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