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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트’와 ‘퀄’ 사이에서 성찰하기
‘퀀트’와 ‘퀄’ 사이에서 성찰하기
  • 김규석
  • 승인 2023.06.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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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김규석 고려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김규석 고려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모바일 환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제 SNS 알고리즘은 필자의 행동 패턴을 인식해서 ‘대학원생이라면 알아야 할 것들’을 필자에게 수시로 보여준다. 직접 찾아보지 않아도 유용한 정보를 알아서 제공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연구방법론과 관련한 광고나 게시물을 훑어보고 있으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R과 Python을 이용한 빅데이터 통계 분석’, ‘회귀분석부터 구조방정식까지 하루에 마스터 하기’ 등과 같은 양적 연구방법론 특강의 홍보다. 회당 수십만 원의 수강료는 예사다. 그마저도 몇십 퍼센트 할인된 가격이라는 선심성 문구도 함께 말이다. 주로 미국대학에서 고급스러운 기법을 배워와서 국내 유명 대학에 출강한다는 강사진의 화려한 프로필도 눈길을 끈다.

OO대학 통계학과 A교수님께서 ‘빅데이터’라는 유행어의 허상을 지적하며 개탄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있다. 최근에 출판된 서적에서 ‘4차 산업혁명’을 내세워 교육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장사꾼이라는 다소 과격한 진단을 내린 XX대학 사회학과 B교수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데이터의 시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의 데이터는 주로 ‘정량적 데이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대학원도 ‘양적 느낌’으로 충만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질적 연구를 하던 필자도 면담 전사 자료나 문헌자료를 ‘데이터’라고 지칭할 때 이유 없는 어색함을 느끼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대학원 진학 후에 수강했던 연구방법론 관련 수업은 ‘퀀트’가 연구방법론을 압도하는 힘을 잘 보여주었다. 담당 교수님은 본인이 양적 연구자임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고, 수업 중 이따금 “자세한 것은 방학 때 열리는 양적 연구 워크숍을 들으면 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물론 워크숍의 하루 수강료가 SNS의 광고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수십만 원이라는 사실은 애써 밝히지 않으셨지만 말이다.

이 수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 학생은, HLM, EFA/CFA, LCA/LTA와 같은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마치 고급 통계를 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또래 압력’(peer pressure)을 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기세등등함이 느껴졌다. 질적 연구를 통해서도 연구자로서의 진정한 역량과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수업을 수강하는 한 학기 동안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분야와 시기마다 연구방법론이 활용되는 양상은 다를 것이다. 다만 필자가 전공하는 교육행정학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실증주의와 구성주의에 대한 이분법적 배타성과 학계에 만연한 ‘양적’ vs ‘질적’ 연구 방법의 이원론적 해석과 적용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회과학을 자연과학과 동일시하면서 보편 이론을 추구하는 실증주의를 양적 데이터와 고급 통계기법을 활용한 연구방법론과 연결 짓는 한편, 행위자와 구성원의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중요시하는 해석주의와 질적 연구 방법을 기계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두 가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상호 보완적인 기능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문제의식이 드러나고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은 간혹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 의미를 잘못 해석하게 만든다. 

일찍이 폴 파이어밴드와 토마스 쿤이 주창했던 불가공약성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공통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는 특정 시대와 사회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과학적인 표준에 관한 것으로, 패러다임 간의 상호비교나 평가가 명확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공약성은 각기 다른 패러다임을 하나의 잣대로 측정·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 특정 패러다임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또는 상보적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적 시각으로 학문의 지식기반과 연구 방법을 바라보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특정 패러다임이 다른 경쟁 패러다임과 비교하였을 때 무조건적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상보성은 서로 경쟁하는 패러다임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제언을 생산하고 학술적·지식적 진보를 이끄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퀀트’와 ‘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단순한 상호 배타성을 넘어, 실증적 방법론이 해석주의적 관점보다 과학적이고, 따라서 우월하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유의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가 알고 지내던 국내 굴지의 연구중심대학 물리학과 C교수는 양적연구방법의 금언이라 할 수 있는 ‘유의수준 0.05’에 대해 “말장난 같은데요”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퀀트의 정신과 유용성을 존중하고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높은 수준의 양적연구방법 숙련도를 갖추고 싶은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문후속세대 연구자로서 ‘양(量)방’과 ‘질(質)방’의 우열을 가리는 능력이 아니라, ‘나는 연구자로서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를 가슴에 담고, 둘 사이에서 부단히 성찰을 이어가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매일 되새겨 본다.

김규석 고려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교육학과 교육행정/고등교육 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0년부터 성균관대 국제처 등의 부서를 거치며 고등교육 국제화 분야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2017년부터 한국뉴욕주립대에서 전략기획팀장과 입학팀장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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