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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에서 메르켈까지…‘기민련’으로 본 정당국가
아데나워에서 메르켈까지…‘기민련’으로 본 정당국가
  • 문수현
  • 승인 2023.06.09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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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독일현대정치사』 문수현 지음 | 역사비평사 | 456쪽

굳건한 지구당 조직과 협회가 느슨하게 연대한 링크 정당
‘느림’의 대명사로 추진하는 정책의 놀라운 일관성

전후 독일의 정치사는 구도시의 문제를 뼈아프게 새긴 건축가에게 신도시 건설을 위한 넓은 땅이 허용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109일짜리 정부가 그리 놀랍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럽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 체제 및 전쟁으로 귀결된 이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구상된 시스템이 ‘독일연방공화국’이었다. 지방분권을 강화하고 강력한 상원과 헌법재판소를 만들어낸 것, 연방총리의 권한을 강화한 것 등이 연방공화국 ‘디자인’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 『독일현대정치사』 보러 가기

기독교민주연합(이하 기민련)은 이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부대’에 담긴 ‘새 술’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창당된 가톨릭 중앙당에 연원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1950년 창당된 기민련은 뚜렷하고 분명한 이념적 지향성을 가진 정당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로 보자면 보수주의, 자유주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패치워크 정당’이었고, 조직상으로 보자면 중앙당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정당이 아니라 지구당 조직이 굳건하고, 여성연합, 청년연합, 노동자위원회 등 여러 협회들이 느슨한 연대를 이루는 ‘링크 정당’이었다. 창당 직후 분당이 이루어졌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이처럼 취약한 구도를 가진 정당이었으면서도 기민련은 ‘체질상 여당’이라 지칭될 정도 긴 세월 독일의 집권 여당일 수 있었다. 서방통합, 유럽통합, 사회적 시장경제, 독일통일 등 현대독일사의 굵직한 줄거리가 기민련 집권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이를 기민련 정치의 ‘성공’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보다 지난 73년간 기민련의 궤적을 따라가 봄으로써 독일현대 정치의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먼저, 기민련의 정치는 ‘한판 승부’에 따른 ‘승자독식’의 정치가 아니었다. 독일은 주의회 선거결과가 상원인 분데스랏 구성을 좌우하고, 이 선거가 주마다 다른 시기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거가 없는 해가 거의 없는 선거의 나라이다. 이로 인해 연방의회 다수당과 상원 다수당이 일치하지 않거나, 연정에 참여한 정당이 모두 교체되는 안전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1998년 단 한 차례였을 정도로 권력 분점의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었다. 한 정당이 단독으로 집권한 사례가 전무했고, 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에어하르트를 제외한 모든 총리 및 총리후보자들이 당대 협상의 달인으로 꼽히는 인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라면 ‘기민련 바이에른 지부’였을 기사련(CSU)이 독자적인 정당이면서도 하나의 교섭단체를 이루고 있고, 중앙당이 아니라 지구당에서 연방의회 후보선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지사 등 지역조직의 맹주들이 중앙당의 지도자로 부상해온데서 드러나듯이 지역 조직의 독자성이 강하다. 이러한 구도는 개개 의원들이 중앙당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줄서기를 해야 의원으로서의 ‘고용안정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보루가 되었다. 

 

기민련 로고. 이미지=위키백과

무엇보다 기민련은 ‘느림’의 대명사였다. 논쟁이 될 정책들에 대해서는 끝없이 논의하고 또 논의한 끝에 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놀라운 일관성을 보이는 일이 드물지 않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이루는 핵심적인 정책이자 기민련 내의 경제계와 노동계가 격렬히 맞섬으로써 가장 논쟁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였던 ‘공동결정권’이 20년이 넘는 세월 당내에서 논의되어야 했지만, 1966년 이 문제를 담당한 위원회의 장으로 임명된 비덴코프가 2005년 다시 공동결정권 개편을 위한 위원회의 장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기민련의 DNA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협상, 지역조직의 독자성, 느림 등을 특징으로 하는 기민련의 정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일관성과 지속성의 정치일 수밖에 없었다. ‘실향민동맹’, 기사련과 연대한 기민련의 보수정치가들이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기민련 정치사상 가장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정책이었던 ‘동방정책’ 마저도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기민련 정부의 정책으로 수용되고 고착되었다. 특정한 정책들이 진화, 발전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 정치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아데나워의 서방통합, 에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 가이슬러의 새로운 사회문제, 폰 바이체커의 기민련 기본강령 등 기민련의 대표적인 정치가들이 고유한 정치적 브랜드를 가진 정치가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기민련의 이와 같은 ‘다른 정치’가 ‘나은 정치’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빠른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파악하기도 어려운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 21세기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코로나 시국을 지나며 집단학습을 한 바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독일의 제도는 독일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정치’의 언어가 스며들어서 ‘나은 정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숨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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