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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의 코민테른, 중국의 코민테른
소비에트의 코민테른, 중국의 코민테른
  • 조대호
  • 승인 2023.05.08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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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학은 지금
조대호 중국인민대학 역사학원 박사과정
조대호 중국인민대학 역사학원 박사과정

20세기 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본영이었던 코민테른은 워싱턴회의에 실망한 억압받던 민족들에게 한 줄기의 희망과 같은 조직이었다. 경제적 사정이 녹록지 않던 중국과 한국에게, 코민테른이 두 나라에 쏟아부은 금액만 하더라도 현재 가치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 독립운동가의 회고록에 따르면 “빨간 물 묻은 돈은 죄다 쓰고 싶지 않다며 손을 저어댔지만, 그 돈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단언컨대 몇 안 될 것”이라 할 정도였으니 돈 앞에서 애국인사들 역시 무너졌던 아픈 사실도 있다. 코민테른이 창설된 직후 얼마간은 정확하고 통일된 강령이 없었기에 설령 피압박민족 국가의 민족주의자일지언정 적어도 코민테른에게 이들은 모두 교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자선단체도 아니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이하 ‘소아’로 통칭)가 국내 정세도 안정되지 않은 마당에 그렇게 돈을 뿌려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코민테른의 본심은 10월 혁명의 성공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세계 각지에 공산당 지부를 설치해 소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위성국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구미에 대항해 소련식 가치를 내세웠고 소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외국 국적의 활동가가 필요했다. 코민테른이 해체된 지는 80여 년이 흘렀는데 뒤늦게 누군가 이 길을 꼭 빼닮아 따라가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중국이다.

3년 전 필자의 모교인 중국인민대에서는 국제문화교류와 학술연구 협력을 혁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중외 문화교류의 중대한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한다는 취지로 ‘국제문화교류학술연맹’(이하 연맹)을 조직했다.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제치고 필자의 모교가 선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필자의 학교가 세칭 제2의 중앙당교(학교가 열린 학문의 장이라기보다는 당의 이익을 대표하는 나팔수라는 의미에서 사용)라고 불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맹은 대단히 광폭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들은 문화교류라는 기치 아래 전 세계 우수 국가의 대학들과 교류 협정을 맺고 중국식 가치를 전파했다. 신장 위구르나 티베트 자치구 같이 서방이 국제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민감한 문제를 제기하면, 중국의 뜻을 대변할 외국 인사들을 초청한 학술대회(사실상 발표대회)를 개최해 대응했다. 필자 역시 단골손님으로 초청받는 인사 중 하나인데 중국의 이와 같은 행보는 코민테른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서방이 신장 위구르족 인권문제를 제기해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릴 무렵 필자도 초청장을 받았다. 또한, 한번은 신장인권포럼에 참여해 필자가 지난번 방문했던 신장의 모습에 대해 말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필자가 다녀온 도시는 신장의 성회(省會)인 우루무치였다. 서방이 말하는 수용소 같은 곳과는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인권탄압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원고에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실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상 깊었던 광경은 버스를 탈 때 위구르족과 한족이 나누어 앉아 타고 가는 것 정도였다. 필자는 이 모습에 대해 “‘이질감’이 느꼈다”라고 원고에 적었는데 얼마 후 수정요구가 들어와 ‘차이’라 단어로 변경했다. 이 원고의 통과 과정은 현실 외교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한 기회였다.

중앙당 주관으로 열린 행사는 규모가 크고 예산도 많기에 손님들에게 고급 호텔과 질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 북경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내게 그럴듯한 명찰도 나왔다. 가만 보니 이 모습은 마치 20세기 초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초청된 피압박민족국가 주요 인사들의 회고와 꼭 빼닮아 있었다. “번쩍이는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장식들 그리고 이들이 내게 베푼 대접, 10월 혁명은 확실히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견인차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개 한국 학생이 중국TV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주요 인사들과 나란히 마주했었던 경험은 분명 얻기 힘든 기회였다. 

감사한 것은 감사로 그치면 되는 것이지 찬양으로 이어지면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가 돼 버린다. 나는 그 밖에 여러 행사에 참여하며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학생들의 원고를 주의 깊게 경청한 적이 있다. 대부분 중국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찬양일색이었다. 다시 크렘린궁이 떠올랐다. 이들에게 중국은 과거 코민테른이 존재하던 때 소아(蘇俄)와 같을 것이다. 

희망을 품을 수도, 기대도 할 수는 있겠지만 다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들의 나팔수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중용을 견지하자. 중용은 중국이 좋아하는 중국식 가치 중에 하나다. 그리고 중용의 태도는 분명 중국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조대호 중국인민대학 역사학원 박사과정
중국인민대학 역사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시베리아지역 화교와 한인 공산주의자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근현대사가 전공이다. 주요 연구영역은 중국공산당사, 국제공산주의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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