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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중심부 진입한 ‘증오’…이해·공존이라는 차선책
사회 중심부 진입한 ‘증오’…이해·공존이라는 차선책
  • 엄한진
  • 승인 2023.05.08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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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증오를 품은 이를 위한 변명』 엄한진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 416쪽

‘혐오·적대감·거부감’ 아우르는 개념인 증오
객관적 요인 분석보다 주체들에 대한 비난

먼저 제목에 한껏 멋을 부린, 그래서인지 모호한 이 책의 정체에 대해 다소 길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외국인, 여성, 이슬람, 빈민,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무언가가 ‘결여된’ 집단을 향한 혐오나 서구, 기독교, 백인, 부자, 남성과 같이 무언가를 ‘가진 자’에 대한 강한 적대감, 자신과 다른 정체성이나 견해를 가진 이들에 대한 거부감 등을 ‘증오’라는 개념으로 아우르고 있다.

 

유럽과 중동·북아프리카, 미국과 동아시아 등 지역이 다르고 이주, 젠더, 종교, 민족, 계급 등 영역은 다르지만 이 현상들이 유사한 배경과 기제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하여 증오 현상에 관한 총론을 시도한 것이다. 시기적인 유사성도 이러한 과감한 시도를 부추겼다. 2014년경 중동 지역에 화려하게 등장한 IS라는 단체가 극단적인 행태를 통해 이슬람 테러리즘과 이슬람 혐오의 흥행을 주도했고, 같은 시기 흑인, 여성, 아시아계 주민 등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각박해진 미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주었다. 유사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여성혐오 현상과 이를 둘러싼 논쟁이 사회 갈등의 전면을 장악하게 된다.

증오 현상이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민주화 운동과 같은 전통적인 이슈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게 되면서 이제 주변부나 음침한 지하에서 나와 사회의 중심부에 진입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증오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제도권 정치에서 극우파의 존재가 더 이상 불경스럽지 않고, 증오범죄가 사회갈등의 주된 양상 중 하나가 되고, 혐오 현상이 일상의 주제가 되어 버린 현실은 기존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외로운 늑대’나 테러 집단, 또는 시대착오적인 극소수가 아니라 인구의 다수가 적어도 하나쯤은 가지게 된 이 꺼림칙한 감정에 대해 구분하고, 격리하고, 처벌하고, 계몽하는 식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증오와의 공존을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얘기하고, 집단 면역이라는 비유를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제목에 쓰인 ‘변명’이라는 표현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영돼 있다. 증오는 계몽되지 못한 또는 사악한 어떤 이가 사회에 퍼뜨리는 독소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조이며 그 안에 있는 모두가 앓고 있는 질병이다.

따라서 우연히 이 시대의 한계를 떠안은 불행한 개인들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증오를 품은 이들’에 대한 손쉬운 비난의 이면에는 다양성과 소수자와 관련된 확신에 찬 신념과 그것에서 나오는 쉬운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그런데 민도(民度)가 높고 관련 제도적 장치가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도 증오 현상이 결코 약화되지 않는 현실은 증오 영역에 확신과 낙관주의는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소수자에 우호적인 담론이나 정책이 반동적인 흐름을 초래하는 역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양자 간의 내재적인 관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출판사에서 책의 부제에 ‘사회학’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했을 때 식상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책은 여러모로 사회학적이었다. 다양한 유형의 사회집단에 대해 가지게 되는 증오의 감정이나 행동을 유전적·심리적 요인이나 성장환경과 같은 개인적인 요인보다 사회의 구조와 조건으로 설명한다거나, 증오 현상이 항상 그래왔던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산물이며 정치권력, 언론, 학문 등 위로부터 만들어진 측면이 강하며, 그렇지만 우리는 증오를 낳은 객관적 요인에 주목하기보다 증오의 주체들에 대한 비난으로 내몰린다는 등의 얘기들이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데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반면에 다소 서둘러 출간한 탓에 각 부분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가설이나 필자의 직관 정도인 내용이 많다. 난삽한 서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부분 부분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다는 변명을 해본다.

 

 

 

엄한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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