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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올려다본 대학
바닥에서 올려다본 대학
  • 이수경
  • 승인 2023.05.01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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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이수경 부산대 철학과 강사
이수경 부산대 철학과 강사

나는 비정규교수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켜보며 연구와 노동을 같이 이야기하고, 대학을 다시 생각하고 대학에서 다르게 머물고 있다. 

2012년 가을, 부산대 본관 앞 땅바닥에 앉아서 들었던 숫자들이 있다. "25년이 넘는 연구와 강사 생활...53세...연봉 1천만 원...퇴직금 0원..." 그것은 나의 스승이자 선배, 그리고 나의 미래를 가리키는 숫자였다. 본관 앞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그 숫자들이 생소했던 건, 우리의 가난이 종종 탄식과 한숨으로만 이야기되곤 했던 탓일 테다. 대학원에 들어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여기는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걱정어린 조언이었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열패감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소망과 계획을 '사치'로 만들어 사그라뜨리는 무력함. 장학금·알바·휴학이라는 선택지를 허물고 세우는 것이 연구생활의 일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가 가난을 발설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또한 연구의 조건이자 윤리와 연관된 말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구가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가난은 독립의 다른 이름이며 연구의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독립은 우리가 무엇에 기대어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일이어야 한다. 연구가 향하고 닿아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이 없는 연구의 행방은 연구비 확보를 향한 선정 경쟁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아직 스스로 연구자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색하던 때 반지하의 연구공간에서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오직 글을 쓰게 하는 장면들과 인용들을 보듬고 있던 그때, '가난'과 '무력함'을 다른 말로 바꿔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것 같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무엇이든 플러스 마이너스로 셈해지는 세계 속에서 그와는 다른 셈법, 우리의 만남과 '함께 함'의 비용을 생활의 대차대조표로 써보려고 애쓰던 사람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2010년 즈음의 필자가 살던 부산의, 그리고 한국의 거리 곳곳에서 나는 그런 싸움을 하는 이들을 만났고, 들었고, 배웠다. 존엄과 평등이라는 함께 사는 방식을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시도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배운 말들과 장면들을 지금도 내 연구의 조건이라고 여긴다. 

2012년 대학 본관 앞 땅바닥에서 울리던 숫자들은 열패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비정규교수 노동조합의 투쟁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숫자는 대학의 제도, 교육환경과 학문 공동체의 일과 연결되자 다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무엇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 거리 곳곳에서 들었던 그 말을 본관 앞 천막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천막을 치자, 사람들이 모였다.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사람들이 와주었다. 대학은 존엄과 차별철폐를 외치는 현장이 되었다. 천막에서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나는 다른 말을 그렇게 또 배우기 시작했다. 단결권, 단체교섭, 단체행동, 그러니까 노동3권과 대학.

단체교섭 과정과 결렬의 과정은 한 편의 연극과도 같았다. 그 과정은 숫자의 근거들, 숫자들에 봉인되었던 대사를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이다. 숫자는 우선순위와 가치의 문제인 한에서 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언어들의 번역이다. 우리는 교섭과정에서 숫자를 둘러싼 우리의 대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사는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는 등의 차별과 배제의 말들, 혐오발화들, 듣기 힘든 말들이 쏟아지지만, 그런 장에서 우리의 대사들을 연극처럼 무대 위에 올려놓을 때만 우리는 우리의 말을 확인하고, 논쟁하고, 문제 삼고, 이의를 제기하며, 마침내 대사를 수정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연루된 말의 수정이기도 하기에 지난하고 불화하고 깨어진다. 

투쟁의 지난함에 비하자면 결실은 소박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1000원을 둘러싼 경우도 있지만, 전원 해고를 막는 일이기도 하다. 그 사소함은 우리의 연구와 생활을 보듬고 지킬 수 있도록 한다. 셈법과 차별적 언어를 확인하고 폐지하고 바꿔가는 일은 존엄한 삶을 외치는 수많은 차별철폐의 싸움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구의 조건을 생각하면 언제나 나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존엄의 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의 땅바닥에서 싸우는 이들을 생각한다. 대학, 연구, 노동, 구조조정, 지역, 교육 이런 말들과 함께 땅에서 주워 품었던 문장을 지문처럼 생각한다. 

여러 이유로 한국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대학은 많지 않다. 물론 노조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곧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우리의 차별적 언어를, 그런 생활의 몸짓을 바꾸기를 시도할 수 있는 장을 여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조의 경험을 전하는 까닭은 무소용해 보이는 우리의 연구와 글이 어떤 세계와 접속하고 우리의 몸과 언어를 바꾸고 삶과 세계가 바뀌는 일을 소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수경 부산대 철학과 강사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산대분회 조합원이다. 「발터 벤야민의 이미지공간: 복수의 기억과 아이들의 기억」을 썼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와 거리의 이야기들을 잇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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