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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화된 교류와 사라지는 관계
의례화된 교류와 사라지는 관계
  • 정찬혁
  • 승인 2023.04.24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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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정찬혁 전남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정찬혁 전남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연구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감사” 인사다.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는 의례는 대부분의 연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헤겔의 법철학 연구서, 자유란 무엇인가의 저자 클라우스 피베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보낸다.

대표적인 헤겔의 연구자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한스 풀다와 루드비히 지프, 미국의 로버트 피핀, 일본의 오하시 료스케 등 국적을 막론한 수많은 연구자들이 피베크의 글속에 등장한다. 수많은 학자들의 이름을 통해 학문적 관계망이 국가와 세대를 넘나들어 한 권의 연구로 응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났다. “내가 속한 곳에는 이러한 교류와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다른 지역의 대학 상황이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앞서 게재된 ‘학문후속세대의 시선’을 읽어보니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속한 전남대 철학과 대학원에서는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수와 강사들은 각자 몸담은 사업단 운영과 연구실적 때문에 시간이 없다. 

전일제 학생으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들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사업단의 간사나 보조 연구원으로서 연구와 생활 사이에서 균형 잡기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그런 대학원생들 또한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교류를 시도해볼 여유가 없다. 업무가 끝나면 미뤄둔 논문작업과 연구를 바쁘게 진행해야 한다. 연구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모임이 아니라면 만남을 가질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학위논문 발표회장이나, 학과에서 주최하는 강연회 자리에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교수와 대학원생을 비롯해 학부생들까지 참석했다고 하지만 요즘 논문 발표회는 지도교수와 발표자만 참여하는 행정적 절차나, 낡은 의례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더욱이 안 그래도 멀기만 한 학우들의 관계가 코로나19로 더욱 멀어져 버렸다. 그나마 예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학우들은 알음알음 교류를 지속했지만 신입생들의 사정은 달랐다. 2021년 비대면 수업이 전면화 된 이후 입학한 학생들은 몇 년이 지났지만 서로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원 세미나실이나 정독실과 같은 학생 공간들 모두가 방역문제로 폐쇄된 탓에 신입생은 수업 시간 외에는 대학원생이 얼굴을 서로 마주할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수업은 물론 정기적인 학위논문 발표회나 토론회마저도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발표자와 지도교수만 참석하는 것으로 간소화되어 각자의 존재만 감지하고 대학원을 마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되면서 중지됐던 대학원의 만남이 재개되고 있다. 대부분의 수업이 대면으로 전환되고, 더불어 그동안 중지됐던 스터디나 연구 세미나도 다시 열리고 있다. 나도 오랜만에 세미나에 참석해서 사람들과 근황을 나누고, 열띤 토론에 참여했다. 함께 텍스트를 읽으며 해석의 옳고 그름을 따지던 와중에 한 학우가 말했다. “혼자 정답을 찾아야하는 공부가 아니라, 함께 논의하는 공부라서 즐겁다고 했다”라고. 2022년에 입학한 그 학우는 교수에게 논문지도를 받았던 것이 대학원에서 경험한 학문적 만남의 전부였다고 한다. 사람들과 함께 해석을 고민하는 것이 생경하기도 하고 즐겁다고 한다.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만남이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대학원의 만남이나 학문적 교류가 행정적 절차나 실속 없는 의례처럼 여겨지는 것이 요즘 대학원의 풍토인 듯 보인다. 무엇이든 ‘가성비’가 중요한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는 시간과 감정만 소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대학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논문은 혼자 쓰는 것이다”라는 오래된 경구(?)처럼 전문 연구자가 되기 위해선 외롭게 홀로 학업을 이어가야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학문의 발전은 홀로 공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와 세심한 상호간의 피드백이 오고가야만, 생각의 깊이가 더해지고 연구의 질적 측면이 향상된다. 따라서 이제는 의례처럼 굳어진 만남의 의미를 다시 고찰하고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정찬혁 전남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남대에서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철학 말고도 영화와 지역학에 관심을 두고 지역에서 연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헤겔 법철학을 중심으로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 항쟁 그리고 소수자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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