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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논쟁의 진행 규약을 수립하자”
“학술 논쟁의 진행 규약을 수립하자”
  • 오수창
  • 승인 2023.04.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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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를 통한 비평은 폭넓게 허용해야

오수창 서울대 교수(국사학과)는 『역사비평』 140호(2022 가을)에 계승범 서강대 교수(사학과)의 『모후의 반역』(역사비평사)의 실증과 시각에 대해 「조선시대 대비 지위와 인조반정의 재검토」라는 제목으로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계 교수는 『역사비평』 141호(2022 겨울)에서 「인목대비 폐위 논쟁과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오 교수의 비판에 답했다. 하지만 오 교수는 계 교수의 답변 형식의 논문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판단해, 『역사비평』 측에 재반론의 기회를 요청했다. 『역사비평』은 ‘반박과 재반박의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라는 이유로 재반론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역사비평』에 서평논문을 게재했던 오수창 서울대 교수(국사학과)가 <교수신문>에 학술토론·학술지의 공공성에 대한 기고를 보내왔다. 이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는 논쟁의 두 당사자에게 추가 토론 기회를 제공하여 논쟁을 마무리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토론은 학자들이 활동하는 여러 유형 중 하나가 아니라 학문 활동의 중심이자 본질이다. 학자의 논문과 책은 학계를 향한 발제이며, 그것들을 둘러싼 활발한 토론을 통해 공통의 기반을 강화하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토론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 논쟁이 된다. 논쟁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다른 학자들이 최선을 다해 논리적 합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므로 학계에 뚜렷한 이정표와 튼튼한 공통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 위와 같은 논쟁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논쟁이 시작되더라도 감정적 공방으로 전이되는 사례가 많고, 논란이 주변적이고 파생적인 문제로 옮겨가 중심 논제가 흐려지기 쉽다. 이런 문제들은 논쟁 참여자들이 자세를 바로잡는다면 해결되겠지만, 논쟁을 언제까지 진행해야 하며 논쟁의 공간을 어디까지 제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가 다시 복잡한 논란이 되어버린다.

학술토론은 대개 전문 학술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논쟁이 초점을 잃고 소모적으로 진행된다면 학술지 운영자, 즉 편집위원회는 판을 닫고 자리를 걷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안의 핵심 논점에 중대한 오류나 왜곡이 있다면 논쟁 당사자는 상대방의 문제점을 철저히 규명하려 할 것이다. 논쟁의 종결에 앞서 논의가 더 필요한가, 더 이상의 논의는 소모적일 뿐인가 하는 판단 사이에 기계적 기준은 찾기 힘들다. 때로는 그만 논쟁을 종료하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자는 판단에 모두 동의할 수 있겠지만, 핵심 논제에 결정적 오류를 던져둔 채 논쟁이 중단된다면 논쟁 당사자든 학술지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오류를 심사위원이나 편집위원이 모두 잡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 논지에 결정적 왜곡과 오류를 범했다는 반론이 있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바로잡을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심사위원이나 편집위원들도 걸러내지 못해 그대로 공표된 오류를 독자들에게 꿰뚫어 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소모적 논쟁으로 흐를 우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편집위원회에서 논쟁을 임의적으로 중단시킨다면 독자들은 그 오류를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편집위원회의 결정이 미리 공지된 원칙 없이 임기응변으로 이루어지고 논점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된다든가, 그에 더해 학술지 운영이 진리 추구와 시비 판별을 포기한 채 논쟁의 현장관리마저 회피하려는 무사안일의 혐의가 짙다면, 논쟁의 중단은 정당성과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문제는 학술지 운영의 자율성으로 이어진다. 편집위원회는 독자적 판단 위에서 학술지를 구성해야 하며 외부에서 부당한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학술지는 운영진의 사유물이라기보다 학계의 공론장이다. 등재지 지정과 같은 국가적 제도 속에 운영되는 학술지라면 그 공적 성격과 책임은 더욱 강해진다. 논쟁의 양측에 단 1회라도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 논점의 확산을 막고 결정적인 문제만 간략히 서술하게 한다면 학술지 간행에 부담이 될 이유도 없다. 편집위원회에 논쟁을 중도에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권리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 학계 내부에서는 위와 같은 갈등을 해결할 장치나 절차를 찾기 어렵다. 사법부의 판단을 빌려서라도 옳고 그름을 확인하고 학문 공론장을 정비하면 좋겠으나, 학술 논쟁의 진행을 외부 권력에 맡길 수도 없다. 개별 사안의 부당성은 그것대로 다투어 나가되 학계의 더욱 근본적인 성찰과 논의가 필요하다. 논쟁은 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필수 활동인데 거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지, 학문 주체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학문 공론장의 절차와 질서를 가다듬는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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