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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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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 담론의 윤리 아쉽다

▲교수신문 제403호에 실린 홍윤기 교수의 글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논쟁이 되어버려 사족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마지막으로 전반적으로 정리해보고 싶다.

천규석은 그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 ‘유목주의’, ‘노마디즘’이라는 말들이 담고 있는 복합성과 이질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침략주의’로 고발하고 있으며, 그 철학적 기초로서 ‘천의 고원’을 논했다. 여기에서 그는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다”고 말하면서(“그 어떤”이라 했으니 아마 천규석은 ‘천의 고원’을 다른 모든 ‘철학교과서들’과 일일이 비교해보았나 보다), 이 말과는 모순 되게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도 말한다.

신중한 이해 없는 비판은 독약일 뿐

천규석은 ‘유목’이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은유적 의미를 전혀 구별하지 않은 채 ‘천의 고원’을 자신의 맥락으로 환원시켜 ‘침략주의’로 규정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국가장치의 외부를 뜻하는 ‘전쟁기계’를 그저 ‘전쟁’이라는 말만 보고 일종의 정복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생태운동, 동성애자 운동 등등)의 맥락에서 등장한 욕망 개념을 ‘퇴폐주의’로 비난한 것을 비롯해서, 단순히 틀렸다거나 오해했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에 있다. 천규석이 단지 틀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이야기들을 논의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어떤 사상을 이런 식으로 비난하려면 그 비난의 대상에 대한 신중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규석은 그 자신이 그저 ‘페이지 수만 넘겨’ 보았고 ‘막연한 인상만’ 가진 그런 책에 대해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 역량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 담론, 사유 등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함축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행위가 단순히 천규석이라는 한 사람의 지적 불성실을 넘어 한국사회의 한 병리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천규석의 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감싸지만 말고 잘못된 것은 지적도 해야

‘천의 고원’은 ‘안티오이디푸스’의 속편이다. 그리고 물론 이 책들에는 매우 복합적인 지적-역사적 배경들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 책의 사상을 논하려면, 더구나 ‘침략주의’라는 등의 정도가 심한 ‘비판’을 가하려면 이런 지적-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말이지 최소한의 근거는 가져야 한다. 천규석 식으로 그렇게 ‘책’을 출간하는 것은 부실공사로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다치고 잘못된 음식이 사람들의 몸을 해치는 것처럼 즉물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경우들과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는 이런 내 서평에 대해서 몹시 거칠게 공격해 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아리송하다. 만일 그가 내 글을 공격하려 했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침략주의’이자 ‘정복주의’이자 ‘퇴폐주의’ 등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천규석은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비난했고, 나는 그 비난이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홍윤기가 해야 할 일은 천규석의 말이 맞고 내 비난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윤기는 오히려 들뢰즈/가타리가 항간에 떠도는 ‘유목주의’들과는 구분되어야 할 나름대로의 ‘치열한’ 사유를 펼치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몇 가지 추상적이고 막연한 제한은 가하고 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맑스/엥겔스를 이어받고 있는 철학자들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들뢰즈/가타리를 잘 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결국 홍윤기에 따르면 천규석이 얼마나 그릇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가가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맑스/엥겔스를 이어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치열한 인물들을 천규석은 침략주의, 정복주의, 퇴폐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도대체 홍윤기는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홍윤기는 정말 논의해야 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서 논의의 초점을 엉뚱하게 틀어버리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유목주의란 침략주의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유목주의는 결코 침략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일까.

홍윤기는 이렇게 정말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서 나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평에서 언급한 ‘원전’이라는 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원전에 대해 무슨 말을 했기에 논의의 핵심이 아니라 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도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또 더 중요한 것은 꼭 원어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희랍어 원전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일본어 등등 외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또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약본을 읽을 수도 있고, 해설서를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 책을 읽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가 아님이 입증됐다”

문제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침략주의’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려면(사실 이런 비난은 정말 강도 높은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침략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저작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논의 대상을 그렇게 성실하게 독해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를 ‘침략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부도덕한 행동이다. 이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누군가를 그렇게 비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그 사람을 정말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홍윤기는 이런 내 주장에 대해 ‘원전 패권주의’, ‘원전 파쇼’, ‘원전 사기극’을 비롯해 정말이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공격했다. ‘원전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내가 전혀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해석’하면서 참으로 악의적인 이야기들을 내뱉고 있다. 내 이야기 어디에 이런 주장이 함축되어 있는가. 아마도 ‘원전’이라는 이 말이 홍윤기 가슴 속의 그 무엇인가를 자극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원전에 바탕한 논의는 중요하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렇게 원전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래서 지금 논의의 초점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던 홍윤기가 이제 원전의 어느 한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어디 한번 원전으로 해 보자’ 하는 식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만일 원전으로 해 보자고 했으면, 지금 이 논의의 핵심에 닿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유목’, ‘전쟁기계’, ‘욕망’ 등등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표현’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홍윤기의 이런 행동이 얄궂게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상가에 대해 제대로 논하려면 바로 이렇게 원전을 붙들고서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홍윤기는 (비록 내용상으로는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원래 주장과는 정반대로, 누군가에 대해 논하고 평가하려면 그의 저작을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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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네요 2006-07-02 14:07:08
원전을 읽지 않았으면 겸손해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정우 선생은 얼마전에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 대한 잘된 번역으로 최민홍 선생의 역을 추천하면서, 한길사 역을 별로 좋지 않다고 평한바 있습니다. 원전을 직접 읽어 보았을리 만무한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시면서, 불어 원전을 보지않은 천규석 선생의 평가는 이다지도 모질게 공격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희랍어를 잘 안다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도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생을 <개념-뿌리들>에서 희랍어 개념을 능수능란하게 사유하는, 그래서 희랍원전도 모두 원어로 읽어보았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테니까요.) 본인이 흐려놓은 논쟁을 상대방의 탓으로 떠넘기지 마십시오. 곱게 보이지가 않네요...

관전포인트 2006-07-02 21:47:24
엄밀하고 충분한 연구와 이해없이 극단적인 수사를 동원해 한 사상가와 그의 철학을 왜곡되게 재단한 천규석 선생이나 그렇게 거칠고 조야한 글을 지극히 자극적인 제목과 광고 문구를 달아 상업적으로 이용한 출판사가 이번 사태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정우 선생에게도 아쉬운 점은 있다. 애초에 서평을 쓰면서 전문가로서의 여유와 아량을 갖고 천규석 선생이 왜곡하고 오독한 점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상세히 지적해 주면 그만일 것을, 흥분한 마음에 원전이 어떻고 저떻고, 2500년 철학사가 어쩌니 저쩌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이정우 선생의 본의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이번 서평은, 그 표현에 있어서, 그가 학문적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게 아닌가 오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특히 천규석 선생이 누구인가! 그는 젊었을 때부터 뜻한 바 있어 농촌공동체를 꾸리는 데에 평생을 바치며, 자신의 사유와 삶을 일치시키려 애쓰며 살아온 드문 사람이 아닌가. 입만 살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며 기만적인 삶을 사는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천규석 선생의 삶은, 이정우 선생이 말했듯이, 오히려 들뢰즈가 의미하는 '유목적' 삶과 닮아 있지 아니한가!

처음부터 불쾌한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고 예의를 갖춘 비판과 논쟁을 벌였더라면 시중의 왜곡되고 오도된 들뢰즈 이해도 바로잡고, 나아가 생산적인 담론을 이끌어내면서 서로 의기투합까진 아니더라도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정우 선생이 학적 엄밀함만을 강조하며 천규석 선생의 삶의 진정성에 충분한 눈길을 던지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안타깝고 아쉽다.

애독자 2006-07-03 10:34:28
이번 논쟁을 보면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천규석 선생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그 날선 비판이 왜 아카데미 안에 있는 들뢰즈를 마음대로 전유하는 일군의 학자들에게는 향하지 않았는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들뢰즈를 팔아서 문화권력을 누리는 함량 미달의 학자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예를 들어 별 시답지 않은 연구소를 차려서 들뢰즈 팔아먹는 이들), 왜 그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을까요?

아쉬움 2006-07-03 10:58:42
아랫분처럼 저 역시 여러가지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저는 천규석님 같은 분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 입장에서는 인문학계의 쏠림 현상과 현실과의 소통문제를 거론하실 수 있고, 비판하실 수 있지요.
물론 왜 꼭 들뢰즈를 통했어야 했는가 하는 의문도 있지만, 우리 인문학계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처한 상황이 그것을 이해하게도 하긴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하신 분처럼 출판사의 선정적인 제목뽑기도 문제였고, 그에 대해 서평을 기획한 교수신문의 선정적 의도(?)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천규석님의 책은 학술적인글은 아니니까요.
물론 이정우선생이 적절한 예의를 갖추고 전문가로서 할 수 있 는 내용적 지적에만 그쳤다면 바람직했겠지만 비판이 감정적인데다 전문가로서의 여유도 없었지요. 거기다 홍윤기 선생 역시 -중간에서 또 논평을 제의한 교수신문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이정우 선생의 행태나학문에 대한 태도만 비판하면 될 것이지 지적 과신으로 인해 잘 모르는 내용을 거론하면서 혼돈만 가중시키고 결국 감정 대립에 치닿는 논쟁으로 이어갔는지 모두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철학동네에서 성실하고 시의적절한 개념적인 반성을 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 판에 교수신문은 들뢰즈를 통해서나마 논의를 부추겨보고 싶었겠지요.
그럼, 기왕에 하시려면 좀 더 지혜롭게 혹은 본격적으로 제대로된 판을 벌려보심이 어떨지요.
가령, 주목받는 철학자에 대해 상반되는 입장의 철학자들의 대담을 기획해 보신다거나, 아니면 철학적 주제를 통해서도 그런 대담이 가능하겠지요. '타자'라든가, '유목주의'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아니면, <깊이 읽기>같은 제목으로 이번과 같이 논쟁적인 신간에 대해 저자와 반론자, 혹은 저자와 다른 전문가의 대담 등을 기획해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교수신문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수고를 짐작하지만, 그 의도가 어땠건 간에 이번처럼 싸움이나 붙이고 구경이나 하자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보단 만남과 소통을 주선하는 매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본격적인 학술적 간행물도 없는 우리 처지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밝음 2006-07-03 23:36:39
우선 처음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우 선생은 천선생의 책에 대해 서평이라는 이름을 빌려 인격적 모독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논쟁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입니다. 원전을 원어로 읽지 않았으면 겸손해야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전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천선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에 대해 귀기울이고, 그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것 또한 담론의 윤리입니다. 또한 천선생이 지향해오고 살아온 삶에 대해 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최소한의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남에게 윤리와 예의를 거론하려면 자신부터 이를 갖추어야 마땅한 것 아닐까요?

자, 다시금 이제 논점을 분명히 해보죠.
천선생과 홍교수에 대해 논쟁은 그 논점을 분리해야 합니다.

천선생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논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에 집중해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한 오해는 그 논쟁의 와중에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고요. 이에 대해 이정우 선생은 성실히 귀담아 듣고 그에 대해 논쟁을 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지식을 밑천삼아 모독을 했습니까?

홍교수와의 논쟁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지난번 홍교수의 답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체 무엇을 논하고자 하는 것인가요?

이번 논쟁을 통해 느낀 것은 가진 자는 스스로의 늪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말이죠. 앞으로 이정우 선생이 무엇을 논하든간에 내가 아는 용어의 정의와 지식에 어긋나는 문장을 본다면, 항상 이선생의 말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