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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理氣合(退) 혹은 氣(栗)…理發 쟁점은 不發
마음은 理氣合(退) 혹은 氣(栗)…理發 쟁점은 不發
  • 황갑연 순천대
  • 승인 2006.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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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리뷰_ ‘율곡학과 퇴계학,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강원대 인문학연구소, 2006. 6. 9)

퇴계와 율곡은 16세기 조선성리학의 쌍벽이자 전체 조선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다. 지금까지 퇴계와 율곡에 대한 연구는 양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대부분 비교보다는 한 학자의 사상을 각각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 형태에 비춰볼 때 이번 ‘율곡학과 퇴계학, 무엇이 같고 다른가’는 연구성과를 차치하고서라도 그 의미가 크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율곡학과 퇴계학 무엇이 같고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기조발표를 했고, 네 명의 학자(이동희 계명대·김낙진 전주교대·강희복 연세대·배병삼 영산대)가 理氣論과 心性論, 그리고 修養論과 經世論으로 나누어 주제발표를 했으며, 이에 대해 네 명의 토론자(최영진 성균관대·윤용남 성신여대·황갑연 순천대·리기용 연세대)가 논평을 해 격렬하진 않지만 퇴계와 율곡의 ‘같음과 다름’을 다른 각도에서 다양하게 조망했다. 그러나 김낙진-윤용남 교수 외에는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유가철학 전반에 해당되는 광의적 주제로 논변을 벌여 긴장감이 덜했다.

윤사순 교수는 기조발표에서 퇴계와 율곡학의 같음과 다름을 주제별로 대비해 전개했다. 학문관의 同異·수기설의 同異·경세관의 同異·심성정론의 同異·우주관의 同異로 나누어, 퇴율철학의 차이에 대한 쟁론을 격화시키기보다는 시대의 요구에 대한 두 학자의 진단 차이(퇴계-道德정신. 율곡-爲民정신)를 배경으로 삼아 양자의 종합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는 주제발표에서 다시 논의됐다. 먼저 이동희 교수가 四端七情論과 人心道心說 해석을 중심으로 ‘율곡학과 퇴계학의 리기론’을 발표했으나, 논평자인 최영진 교수의 토론이 퇴율철학에 대한 이해 차이보다는 일반적인 유가철학에 대한 관점 차이로 진행됐다. 퇴계와 율곡의 수양론에 관한 논변에서 필자는 퇴율철학에서 誠과 敬의 來源 문제를 거론했으나, 강희복 교수로부터 시원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이 문제는 주자 역시 명쾌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퇴율철학의 이해 차이는 두 번째 주제발표인 김낙진 교수와 윤용남 교수 사이에서 진행됐다. 김 교수는 자신의 마음은 퇴계철학에 모여져 있다고 솔직히 시인하고서, 퇴계와 율곡의 비교가 자칫 강박감으로 작용해 양인의 학문차이를 과장하고,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상대적 정체성을 고정시키기 위해 한 사람의 체계 내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소 중 특정 부분을 외면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기하고서 본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양자의 차이가 궁극적인 차이가 아니라, 퇴계에 대한 율곡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은연중 부각시켰다. 논평자인 윤 교수와 벌인 첫 번째 논쟁이 바로 ‘지각으로서의 마음’에서의 허령지각이다. 김 교수는 “퇴계와 율곡은 理氣가 합해짐으로써 虛靈知覺이라는 마음의 기능이 있게 된다”고 하면서 지각작용에 대한 주자의 설명을 인용했다. 이에 대해 윤 교수는 ‘퇴계는 理氣合을 확실히 虛靈知覺의 근거로 보지만, 율곡은 氣 자체를 虛靈知覺이라고 본다. 또 퇴계는 언제나 心을 理氣合으로 보지만, 율곡은 心을 氣로 본다는 것이 퇴율철학의 중요한 차이점이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효율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표점이 설정되어야 한다. 퇴계와 율곡은 모두 자신이 주자철학의 적통적 계승자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주자라는 지표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보면 김 교수와 윤 교수의 견해는 서로 다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다. 먼저 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心은 당연히 理氣의 合이다. 윤 교수는 心을 氣로 본다고 했는데, 이는 心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다. 또 김 교수는 虛靈知覺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예로 들어 퇴계와 율곡이 모두 理氣의 合으로서 虛靈知覺을 이해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허령지각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과 작용의 주체를 혼동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게 할 수 있다. 비록 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理氣의 合이지만, 지각 측면에서 보면 지각의 주체는 氣이다.

사실 퇴율 논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理의 發에 관한 것일 것이다. 김낙진 교수는 퇴계철학에서 理의 발동에 관한 논쟁을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주자철학에 충실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김 교수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김 교수의 설명대로 理는 관념인데, 이 관념이 어찌 활동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주자를 포함한 중국유가철학 전체에서 보면 理가 반드시 율칙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정명도는 理를 神과 함께 이해하고, 주렴계는 태극의 動靜을 ‘動하지만 動의 형상이 없고, 靜하지만 靜의 형상이 없다’(動而無動, 靜而無靜)는 표현으로서 본체의 역동성을 긍정한다. 다시 말하면, 理를 단지 율칙으로만 이해한 것은 정이천과 주자일 뿐 모든 중국유가철학자에 해당되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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