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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팝니다"
"한국은행 팝니다"
  • 박호성 서강대
  • 승인 2006.06.2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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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생각: 한 대학교수의 자화상

나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대학교수임에 틀림없다.

내 몸 가까이 붙어있는 자신의 눈썹은 보지도 못하면서 만리나 떨어진 바깥 세상일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내 책에 쌓인 먼지는 털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먼지는 없애겠노라 야단법석을 피우기도 한다.

나 같은 지식인들에게 집을 그려 보라 하면, 대개는 지붕부터 처억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예 사상누각까지 터억 하니 그려놓기도 하지만. 하지만 일하는 사람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한번은 비오는 날 구두를 고치러 길거리 포장마차 식 구둣가게로 간 적이 있었다. 구두를 다 손질하고 나자 아니, 그 구두쟁이가 구두에 약칠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대뜸 비오는 날 쓸데없이 구두약칠은 왜 하느냐고 지성인답게 빈정거려 주었다. 그랬더니 그 구두닦이가 하는 말이 "보아 허니 가방끈이 그리 짧아 보이지도 않는데, 이 까짓 것도 모르슈? 오늘처럼 비오는 날에는 물기가 가죽으로 스며들어 구두가 쉬이 망가지니, 오히려 약칠을 더 잘 해야 헙니다" 하는 게 아닌가.

날씨 좋은 날 그저 겉으로만 번쩍거리는 구두의 광채만 줄곧 생각하고 있던 나는 말문을 잊었다. 그러한 것이 이른바 '대학교수'의 진면목이었다.

민족과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밭갈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보다 쟁기를 잡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전쟁에 대해 평하는 자보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함은 정해진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계속 밭갈이에 대해 말만하고 전쟁에 대해 평하기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쟁기를 잡고 논밭을 일구거나 갑옷을 입고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도대체 무슨 낯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사생활 속에서는 <나만이 최고> 식 이기적 삶의 자세에 유감없이 탐닉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 생각한다.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아서 그렇다 하고, 내가 그러면, 그 순간에 다른 중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가 친절하게 굴면, 나에게서 뭔가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나의 유쾌하고 자상한 성격 때문이라 한다. 남이 출세하면 워낙 아부를 잘 해서이고, 내가 출세하면 내가 워낙 탁월해서이다. 누군가 그에게 선심용 선물을 하면 다 썩은 것이고, 누군가 나에게 선심용 선물을 하면 그건 인사성이 밝아서 그런 것이다. 남이 뜻을 굽히지 않으면 고집이 세기 때문이고, 내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남이 커피를 즐기는 것은 겉멋이 들어서이고, 내가 커피를 즐기면 그것은 입맛이 고상해서이다. 남이 계단을 빨리 뛰어 오르는 것은 평소 성격이 급해서이고, 내가 계단을 빨리 뛰어 오르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이다. 남이 고향을 들추면 지역감정이 악화되지만, 내가 고향을 들추면 애향심이 돈독해진다. 남이 차를 천천히 몰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차를 천천히 몰면 안전 운전이다. 내가 길을 건널 때는 모든 차가 멈춰서야 하고, 내가 운전할 때는 모든 보행자가 멈춰서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하는 식이다.

한번은 강화도 어느 조그만 포구로 산책을 나갔다가 감동적인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느 노부부가 정답게 앉아 은행 알을 팔고 있었는데, 좌판 위에 자그마한 팻말이 하나 수줍게 올라앉아 있었다. 거기에 무어라고 쓰여 있었을까.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어떠한 고매한 철학자가 쓴 글을 읽고도 여태 가져보지 못한 순박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 팻말에는 딱 한 마디, "한국 은행 팝니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나는 감명에 젖어 용도도 모른 채 은행을 왕창 사들고 집으로 갔다가, 사모님께 엄청나게 바가지만 긁혔다. '밑바닥 인생'들의 지혜는 이렇게도 경탄스러운 것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작은 이슬방울, 가느다란 실개천 하나 하나까지 다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바다의 가없는 깊이가 온전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어찌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자신이 깨끗하다하여 남의 더러움을 기꺼이 포용치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깨끗함이 아니라 결벽증에 지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긴대서 남에게까지 그 길을 강요하려든다면 그것은 옳음이 아니라 자기도취일 따름이라는 것 역시 가슴에 거듭 되새기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박호성 / 서강대·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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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06-06-28 13:17:04
무슨 일로 제목이 바뀌었나 모르겠군요.
하긴 원래 것보단 이게 낫습니다만...

어쨌든 이 글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저 속으로 혼자 되뇌이고 말 일이지, 대놓고 말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뭣보다 "지식인-범인" 식의 이분법이 눈에 거슬리는군요. 물론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뭐든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선 단순히 그런 "아-피아"의 이분법이 아니라, 별로 배운 것 없고 하찮기만 한 저 평범한 이들의 아무렇지 않은 말과 행동에서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그런 태도가 참 보기 안 좋습니다. 그런 태도는 "유아적 태도를 버리자"는 이 글에서 박교수님께서 추구하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박교수님은 이른바 배웠다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그 밖에 여러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겠죠. 따라서 "지식인"이란 것은 박교수님을 규정하는 한 가지 요소일 뿐입니다. 물론 그게 무척 큰 것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요.
이렇게 보면, 그저 마땅히 배운 것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박교수님께서 맘대로 규정해버린 그 구두닦이나 강화의 노인들도 실은 어떤 이들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어쩌면 바로 이 대목에서 "지식인의 독단"이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죠.

결국 박교수님이나 그 구두닦이나 노인들이나... 똑같은 사람들이고, 만약 박교수님께서 그들이 가진 지혜나 재치를 지니지 못했다면, 그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면 그만이지, 그렇게까지 감상에 빠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엔, 그 구두닦이의 지혜를 부러워하기만 하실 게 아니라, 분명 박교수님께도 그에 해당하는 뭔가가 있으실 테니, 그것을 계발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물론 박교수님께서 그(녀)의 노련함을 부러워하면 안 된단 얘긴 아닙니다. 부러워하시는 것은 박교수님 자유겠지만, 적어도 그런 "지식인-범인"(어쩌면 "대학교수-범인"이 더 정확한 대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이라는 엄청나게 잘못된 관점에서, 나아가 마치 "지식인"이라는 마땅히 우월한 입장을 스스로 내던지기라도 한다는 듯한 뉘앙스로 부러워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몰라도) 적어도 제가 보기엔, 교수님의 이 글을 그 구두닦는 분이 본다면 오히려 별로 기분이 좋진 않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너무 지식인 또는 대학교수로서 자책하진 마십시오. 어쩌면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그 구두닦는 양반이나 노인들도 교수님을 보며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