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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9) 대약진 속의 모택동
이중의 중국산책 (9) 대약진 속의 모택동
  • 이중 전 숭실대
  • 승인 2006.06.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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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국 탄생시킨 비방이자 근거"

▲악양루 ©

 

전국이 대약진 운동으로 술렁이던 때였다. 과장되고 거짓된 보고들이 잇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모택동은 여러 번 현장시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타고 가던 전용열차를 멈추게 했다. 기차에서 내린 그는 철로 아래에 나 있는 오솔길을 택하지 않고, 잡초가 우거진, 거친 골짜기로 들어섰다. 호위병들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쪽 길로 가야 한다고 우기는 호위병들에게 모택동은 “길이란 사람들이 다녀서 생기는 것이요. 나란 사람은 종래로 걸어온 길을 되 걸으려 하지 않소”라고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시덤불 속으로 스스로 걸어가던 이 시기가 조금은 미묘하다면 미묘하다. 1959년 4월에 유소기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넘겨주고, 모택동은 6월 25일, 32년 만에 고향 소산을 찾는다. 만 67세의 나이에 부모 산소 앞에서 절을 올린다.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드러나면서 그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소련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공산권이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후계자로 부상하던 고향 후배인 유소기에게 국가 주석 자리마저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향을 방문하고 나서 그는 <소산에 이르러(到韶山)>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현지시찰을 계속했는데, 앞의 가시덤불 이야기는 바로 그 여행 때에 일어났던 에피소드이다.

 別夢依稀?逝川,    이별의 꿈 희미하고 지난 세월 한스럽다
 故園三十二年前.    서른 두 해 전의 고향 마을이여
 紅旗卷起農奴戟,    붉은 기는 농노의 창 들어올리고
 黑手高懸覇主鞭.    검은 손은 몹쓸 패자들의 채찍 높이 들었네
 爲有犧牲多壯志,    희생된 선열들의 장한 뜻 고마워
 敢敎日月換新天.    일월을 휘어잡아 새 천지 일구었네
 喜看稻菽千重浪,    물결치는 벼이삭 즐겁게 보나니
 遍地英雄下夕煙.    전선의 영웅들 돌아오네 저녁 연기 속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고, 이미 나있는 길을 가지 않고,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모택동 성격의 특징의 하나로 들 수 있다면, 다른 한 면으로는 대단한 유연성과, 이중성도 가지고 있는 모택동이었다. 모택동의 오랜 호위였던 이은교는, “모택동 동지는, 당내의 동지들에 대해서는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았지만, 민주인사들에 대해서는 매우 친절하고도 예모 있게 대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민주인사”라는 말이 재미있다. 한국에서 “민주인사”는 굳이 左右로 구분한다면 왼편에 속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선 비공산 계열의 우파 지도자들을 “민주인사”로 불렀다.

 
   정부 수립을 앞두고 모택동은 주은래와 함께 부지런히 시내나들이를 하면서 그들 민주인사를 만났으며, 숙소에서 모실 때에는 미리 마당에 나가 기다렸고, 차에서 내리는 나이 많은 민주인사들을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은교의 증언대로, 평소 가까운 동지들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권위와 카리스마, 권력과 권위를 앞세운 계산된 처신일 수 있다. 솔즈베리가 모택동에 대해 한 말이 이런 대목을 잘 설명해준다. “그는 목표에 대해서는 고집불통이었으나 목표를 성취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그는 사람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천재였으며 자신의 적과 동지를 유익한 협조자로 만드는 데에 있어서도 천재였다”---50행


   통일전선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일이다. 장개석이 ‘마술’이라고 한탄하고, 국민당이 공산주의 특유의 ‘기만전술’이라고 비난했지만, 대지주, 민족자산계급마저도 품속에 넣을 수 있었던, 중공당의 통일전선 전략이야말로 오늘의 중국을 탄생 시킨 ‘비방’이자 ‘근거’였다. 냉전시대에, 통일전선 전략은 공산권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자유진영의 경계대상 1호였다. 베트남의 통일이 그 좋은 본보기일 수 있다.


   중국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핵과 미사일 을 추진했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中美수교의 초석을 다졌다. 이 모든 일련의 통치행위를 중국은 “실사구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도 “실사구시”를 연결 고리로 하여 추진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택동이 이백의 시를 좋아하면서도 두보의 시도 많이 암송하고 있었던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64행


   1964년 기차를 타고 악양루 근처를 지나던 모택동은 수행원더러 붓과 벼루를 가져오라 했다. 그는 일필휘지로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란 시를 써내려갔다. 나중에 이 글씨는 현판으로 새겨져 누각 3층에 걸리게 된다.

   昔聞洞庭水,   일찍부터 들어온 동정호 소문
   今上岳陽樓.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다니.
   吳楚東南圻,   오나라 초나라 동남으로 갈렸고
   乾坤日夜浮.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있네.  
   親朋無一字,   친구 친척 소식조차 끊기고
   老病有孤舟.   늙고 병든 몸 외론 배에 의지하네.
   戎馬關山北    관산 북녘은 아직도 전쟁이라
   憑軒涕泗流    난간에 기대니 눈물이 하염없네.

   1958년, 사천성 성도에 갔을 때, 그는 대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유서 깊은 杜甫草堂을 찾았다. 여러 판본의 杜甫시집 12부 108책을 빌려다가 서너 번 이상씩 읽어보았다고 한다. 나도 두보초당을 가보았는데, 훌륭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특히 우거진 대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중국의 내외 귀빈이 다 다녀가는 곳이다. 모택동을 필두로 북한의 김일성도 등소평의 안내로 두보초당을 찾았었다. 모택동이나 김일성 등의 방문을 기념하는 대형사진들이 전시실에 걸려 있었다.


   김일성이 두보초당을 찾은 것은 1982년 9월이었다. 당시의 실력자 등소평과 나란히 걷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그 사진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두 사람 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양복의 맨 위 단추도 잠그는 이른바 ‘인민복’ 차림이었는데, 겉모양이 서로 다른 것이었다. 등소평의 옷엔 단추 다섯 개에, 아래위로 네 개의 주머니가 있고, 주머니마다 단추가 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옷엔 단추 다섯 개 외엔 주머니라곤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다 같은 공산국 지도자의 복장에도 그런 상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디자인의 차이인지, 아니면 무슨 이념상의 차별성에서 오는 것인지 조금은 궁금했다.


   1980년대 초, 중국은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앞장서서 독려하고 있을 때이고, 북한사회는 세습과 관련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같은 인민복에 네 개의 주머니와, 하나도 없는 주머니, 그 의미마저도 정치적 상징조작의 영역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대비되는 두 체제의 상이성이 무의식의 심층에 깔린 채로 그런 옷차림의 디자인에서도 차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날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세계가 중국의 패권주의를 걱정할 정도로 급성장해버린 중국의 경제와, 아직도 “이밥에 고기 국을 먹지 못하는” 북한을 보는 우리의 눈길이 착잡할 수밖에 없다. ---42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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